심청이 곡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5년 01월 10일(금) 10:06
▲이병록 소장
마을 이름은 나라의 흥망에 따라 높아지거나 낮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한다. 곡성이라는 이름도 시대에 따라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 발음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골짜기 성이라는 곡성(谷城)은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사용되었다.
곡성은 백제 시대에 욕내(欲乃)와 욕천(浴川)으로 불렸다. 이 이름들은 섬진강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내’는 우리말이고, ‘천’은 한문 표현이기 때문이다. 곡성(谷城)은 강에서 골짜기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사실 곡성은 노령산맥과 지리산이 맞닿아 골짜기가 많고, 곡성군이나 석곡면처럼 ‘골짜기’와 관련된 이름도 많다. 고려 시대에는 길이 험해서 상인들이 통곡하며 지나갔다고 해서 ‘울음 소리’라는 곡성(哭聲)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어려울 때 ‘곡소리’ 난다는 말을 쓰지 않는가.
영화 ‘곡성(哭聲)’은 감독 나홍진이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지냈던 곡성에서 촬영된 작품이다. 감독이 지역 역사를 알고 영화 제목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는 곡성을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했지만, 한편으로는 괴기스러운 제목과 줄거리 때문에 곡성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겼을 수도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곡성(哭聲)의 뜻이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곡식 곡(穀)’ 자를 써서 곡성(穀城)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당시 중앙 정부는 이곳을 곡식이 풍부한 곳으로 여겨 세금을 많이 부과하였다. 도로(다시) 골짜기 성인 곡성(谷城)으로 돌아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곡성, 충효의 고향
심청을 가상의 인물로 생각하거나, 그녀가 몸을 던진 인당수 이야기를 백령도와 연관 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곡성에서 심청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심청전’의 원형이 곡성군 옥과면 성덕산 관음사의 사적(寺績)에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소경 원량이 딸 홍장을 시주 대신으로 보냈고, 효심이 깊은 홍장은 쾌히 스님을 따라 떠났다. 여정 중 소랑포에서 진(晉)나라 사신을 만나 황후가 되었으며, 고국을 그리워해 불탑과 불상을 만들어 백제로 보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성덕’이라는 이름의 처녀가 등장하는데, 그녀가 불상을 발견해 관음사에 모셨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지금도 관음사 입구에는 ‘성덕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곡성 관음사 심청전의 원형이 기록된 관음사 입구와 대웅전이다. 1953년, 인근의 백아산이 빨치산의 소굴이라는 이유로 국군이 관음사 전각에 불을 지른다. 당시 보물 제273호였던 원통전이 전소되고, 내부에 있던 보물 제214호 금동관음보살좌상도 얼굴 일부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는 보물과 국보 기준이 없었을 때다.ⓒ 이병록


조선 초기 강진에 병영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했던 마천목 장군은 편모를 모시기 위해 곡성으로 내려온다. 효심이 깊은 장군은 어머니가 좋아하던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섬진강에 어살을 막으려 했으나, 물살이 너무 세서 실패했다. 대신 푸른 빛이 나는 돌을 집으로 가져왔는데, 밤이 되자 도깨비들이 찾아와 돌이 자기들의 대장이라며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도깨비들은 어살을 만드는 대가로 메밀 죽을 요구했는데, 99명분만 준비된 탓에 한 도깨비가 심술이 나서 어살을 허물고 도망갔다. 위키백과에는 유일하게 보존되어 내려오는 한국 최고(最古)의 독살, 혹은 살뿌리라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곡성은 충절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후백제와의 공산(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옷을 입고 대신 목숨을 바친 신숭겸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곡성현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고려사』 열전에서는 춘천 출신으로 나오고 목이 없는 무덤도 거기에 있다.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는 신숭겸의 출생지로 전해지는 용산재가 있다. 1589년에는 천성산 기슭에 덕양서원이 세워졌으며, 이를 통해 신숭겸이 곡성과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태안사 부근에 신숭겸 장군의 목을 묻은 무덤도 있다. 애마가 목을 물고 왔다는 전설은 유팽로와 의마총을 연상시킨다.
유팽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곡성군 옥과면)에 살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 담양에서 고경명 군사와 합세했으며,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 장군을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었다 순절했다. 말이 장군의 머리를 물고 3백 리를 달려 부인에게 전달하고는 죽었다고 한다. 그의 말 무덤은 ‘의마총’으로 불리고 있다.
이처럼 곡성은 의병들의 활약이 빛나는 곳이다. 김병종을 비롯한 이름 없는 많은 이 지역 출신 의병들이 임진왜란 당시 호남 방어의 핵심 역할을 했다. 곡성은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에 왜군 진출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곳 의병들의 헌신은 매우 중요했다.
구한말에는 대마도에서 면암 최익현의 유해를 수습한 성암 조우식이 곡성 사람이다. 친구 아내의 증조할아버지인 이분은 오강사에 최익현과 함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우식은 1921년 일본 경찰이 훼손하자 강하게 항의하며 복원에 앞장섰다. 1937년에는 또다시 훼손하자 목을 매 자결하며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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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정치학 박사
덕파통일안보연구소장
저서<관군에서 의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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