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죽교의 피-정몽주 재미있는 철학이야기(제45화) 영암일보 yailbo@daum.net |
| 2025년 01월 31일(금) 0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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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급제한 정몽주는 1364년 이성계를 따라 여진족을 치는데 협력하고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이성계의 노선에 동조하게 된다. 당파 싸움에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왜나라(일본)에 가서는 외교력으로써 수천 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오는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공동수상 격인 수문하시중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려 하자 이때부터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기회를 노린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환 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정몽주는 방문을 결심한다. 공양왕 4년 4월 4일 아침. 그는 조상들의 제단 앞에 절한 다음 부인과 두 아들을 불러놓고, “나의 묘비를 세울 때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적어라”, 그리고 “새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거절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정몽주와 마주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시조 한 수를 유려하게 뽑아 내려갔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고저”
다 썩어져 가는 고려 왕실만 붙들기 위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칡덩굴처럼 얽혀서 사이좋게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이른바 ‘하여가(何如歌)’의 내용이다. 정몽주는 노래를 다 듣고 나서 좋은 시라고 칭찬한 다음, 시 한 수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 티끌과 흙)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포은은 ‘단심가(丹心歌)’를 통하여 고려조에 대한 충성을 거듭 피력한 것이다.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을 알고 헤어졌다. 정몽주는 자주 드나들던 술집에 들려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어느덧 만수산(개성에 있는 높이 488m의 산. 송악산)의 서늘한 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자 그는 말에 올랐다.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善竹橋, 개성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돌다리)로 향했다. 말이 선죽교에 다다르자, “멈추어라!”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저녁 노을이 지기 시작한 선죽교의 돌다리 위에는 판위위시사(왕의 행차를 호위하는 위위시의 정3품 관직) 조영규가 가로막아 서 있었다.
그는 울며 달려드는 녹사(하급 관리)를 철퇴 한 방으로 쓰러뜨린 다음, 정몽주를 향해 철편을 날렸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이와 다른 설로는 정몽주가 탄 말이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말 혹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마부가 쓰러지자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5∼6명의 괴한이 나타나 부상당하고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 또는 몽둥이와 철편으로 때려 죽였다고도 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고려 충신의 최후를 지켜본 사람은 조영규 외에 이방원이 더 있었다. 그는 다리 밑에 숨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이때 정몽주가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橋脚, 다리를 받치는 기둥)에 일부 묻었는데, 1945년 이후 백범 김구가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다. 이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 역적으로 단죄된 정몽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원(태종)에 의해 복권되었고, 특히 세종대왕은 그를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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