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회군의 진실 그리고 ‘성계탕’

- 심심풀이 우리 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1월 02일(토) 19:40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창업과 망국의 역사는 항상 승자 독식주의에 입각해 기록되었기에 그 포플리즘이 심한 것 같다.

우리 역사 중 그 한 예로 ‘위화도회군’을 들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위화도회군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들을 풀어볼 요량으로 자료를 뒤적이다 심심풀이로 몇 글자 끄적여 본다.

위화도 정벌은 1388년 4월에 출정했다.

당시 전시 합참 격의 백전노장인 최영을 위시한 도평의사사에서는 출정 전 동북아 3국의 국제정세·명나라의 군대상황·기후·보급·국내상황 등 여러 문제점에 대한 가상전투 시뮬레이션을 기획하는 충분한 분석과 대비 없이 출전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당시 요동 지방 명나라 군대는 원나라와 한창 전쟁 중으로 주력군이 빠진 오합지졸 수천명만 남아 있었다.

지휘 체계상 출정군 서열 3위인 우도통사 이성계는 처음부터 출정이 내키지 않았기에 이런저런 핑계로 위화도까지 가는데 무려 20일이 소요됐고, 이런 점을 미루어보면 출정 전부터 가기 싫었던 것 같다.

위화도에 도착 후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진군을 멈춘 채 망설임으로 수십여일을 버티다 총지휘부에서 보낸 독전관을 살해한 후, 요동 정벌에 대한 소위 ‘4불가론’을 제기했다.

그중 한 가지 이유로 장마철을 들었는데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는다.

출정한 음력 4윌은 장마철도 아니요.

다만 출정군의 주력이 당시는 사병위주 편제라서, 20여년을 함께한 충성도가 큰 함경도 출신의 여진족 위주로 편대된 이성계군은 주군에 대한 충성도가 절대적이었고, 또한 생사를 보장키 어려운 전장에 나가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출정군들이 위화도를 건널 생각 없이 추이를 계속 살피며 차일피일 미루니, 평양에 머물던 지휘부 우왕과 최영은 수차례 내관과 관리를 보내 독전을 재촉했으나 미동도 없었다.

이에 우왕의 장인인 도통사 최영이 직접 출정하려 했으나 군왕의 수업을 받지 않은, 나약하고 겁 많은 우왕은 기겁해 포기했다.

이게 큰 실책이었고 임진왜란 때 일본의 풍신주길처럼 최전선의 기찰을 소홀한데다 총지휘관인 도통사 최영이 나이 많음을 이유로 최전선에 있지 않은 것이 결과적으로 회군의 원인제공이 된 셈이다.

이성계는 개경의 정도전·이방원과 여러 차례 연락해 정국의 추이를 살핀 후 고심 끝에 5.16쿠테타 장도영 장군 격인 서열 2위인 좌통사 조민수를 온갖 방법으로 회유해 회군을 결정했다.

회군이 결정되자 5월 22일 회군 시작, 개성까지 불과 9일 만에 6윌 1일 도성 도착, 평생을 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던 상관인 총사령관 최영을 체포 처형하고, 우왕과 아들 창왕까지 참살, 그 후 신진사대부들과 신흥무인세력의 동조로 소위 ‘역성혁명’이라는 미명하에 쿠테타 성공, 과전법을 시행해 민심을 돌린 후 고려의 마지막 보루였던 정몽주를 1391년에 살해하고, 1392년 7월 17일 왕위를 찬탈했다.

집권 후 출신지인 함경도를 제외한 개성지방 이북에서의 이성계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은 돼지국밥을 이성계의 이름을 빗댄 ‘성계탕’이라고 할 정도로 그 정도가 심했고, 그토록 사대했던 명나라의 책봉이 없었기에 9년 넘게 ‘고려 권지국사’(*편집자주: 고려의 임시 국왕이라는 의미)의 칭호로 불리다 태종 원년인 1401년에서야 왕으로 책봉되었다.

역사는 답습되어 훗날 박정희는 1961년 5윌 16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의 시나리오를 개사 답습해 그대로 쿠데타를 감행해 집권에 성공, 18년 독재정권으로 민주화를 더디게 했고, 조선 패망에 앞장선 노론 세력 67명과 친일의 잔재 세력들은 지금까지도 국정개혁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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