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한국의 차’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1월 26일(화) 19:45
이현정 원장
이한영茶문화원장/이학박사
한국 차 전래에는 인도차 전래설, 중국차 전래설, 우리나라 자생설 세 가지 설이 있다. 인도차 전래설은 인도의 공주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혼수품으로 차씨를 가져왔다는 설이고, 중국차 전래설은 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설이다. 이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주 먼 옛날부터 지리산에는 차나무가 스스로 자라고 있었다는 우리나라 자생설이 있다. 우리나라, 특히 남해안 일대는 차나무가 자라기에 적절한 생태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전라남도가 전국 차생산의 70%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차나무가 자라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차나무 자생설에 신빙성이 있음을 뒷받침해준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어떤 차를 어떻게 마셨을까? 오늘날과 같은 녹차, 홍차는 아주 먼 옛날부터 마셨던 차일까? 그렇지 않다. 시대별로 마셨던 차의 형태와 차를 음용하는 방법이 달랐다.

먼저, 삼국시대에는 병차 즉 떡차를 만들어 마셨다. 찻잎을 쪄서, 찧은 다음, 작은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들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건조하여 만든다. 떡차를 마시는 방법은 차를 살짝 구워서 끓여 마셨다. 이렇게 차를 끓여 마시는 방법을 자다법 또는 전다법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차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의 떡차 제다법이 더욱 발전해서 연고차가 만들어졌다. 연고차를 만드는 방법은 찻잎을 찐 뒤 찧어서 포에 넣어 꾹 짜서 녹색의 고를 뺀 다음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들어 건조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연고차를 마시는 방법은 차맷돌에 곱게 갈아서 체에 친 다음 아주 고운 가루를 다완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차선으로 저어 마셨다. 이렇게 차 가루에 물을 부어 차선으로 격불하여 마시는 방법을 점다법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뿐 아니라 서민들까지도 차를 마셨다. 오늘날 길거리에 카페가 있는 것처럼 고려시대에는 서민들이 차를 사고 마실 수 있는 다점이 있었다. 그리고 중형주대의 라는 것이 있었는데, 중형은 엄중한 형벌이고 주대는 임금을 마주보고 아뢴다는 뜻이다. 죄인에게 참형을 결정하기 전에 신하들과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며, 보다 공정하고 신중한 판결을 내리고자 했던 의식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 우리 민족이 차를 얼마나 심오하고 진지한 것으로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잎차 문화가 시작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주로 덩이차인 떡차나 연고차를 만들어 마셨는데,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잎차를 만들어 마셨다. 잎차 문화가 시작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차가 생겨날 수 있었다. 불발효차인 녹차, 완전발효차인 홍차, 반발효차인 청차, 약발효차인 백차 등 제조방법에 따라 다양한 차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잎차를 마시는 방법은 다관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 마셨다. 이렇게 차를 우려서 마시는 방법을 포다법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의 차문화는 상당히 위축되었는데, 그 이유는 불교 문화의 쇠퇴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백성들의 삶이 몹시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축되었던 조선의 차문화가 다시 부흥한 것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제자들과 직접 차를 만들고, 차로 당대의 학자들 자하 신위, 추사 김정희 그리고 승려 초의 의순 등과 교류하면서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구증구포 제다법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제다법이다. 이러한 구증구포 제다법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구증구포는 한약을 법제하는 방식으로, 인삼을 아홉 번 찌고 말려 홍삼을 만들거나 생지황을 아홉 번 찌고 말려 숙지황을 만드는 것처럼, 찻잎을 찌고 말림으로 약성을 변화시켜 자신의 몸에 맞는 차를 만드는 방식이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는 몸과 마음이 병든 상태였기에 본인의 처지에 맞게 차의 약성을 변화시키기 위해 구증구포로 제다하여 차를 마셨던 것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제자들과 다신계라는 약속을 맺는다. 다신계의 주 내용은 해마다 봄이 되면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다산에게 보내기로 한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강진에서 100년이 넘게 지켜졌다. 다신계의 약속이 지켜짐으로써 일제강점기라는 위기의 시절에도 우리차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된것이다.

다산 해배 이후 즉 다신계 약속을 맺은지 100년이 지날 무렵 약속대로 차를 만들어 다산가에 보내오던 이한영은 40대 초반에 일제강점기를 맞게 된다. 우리 땅에서 난 차가 일본차로 둔갑하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 고유의 차상표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어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반포한다. 백운옥판차에는 스승과의 약속을 100년이상 지킨 신의가 깃들어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우리차의 자존심을 지킨 민족의 차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상품 디자인이지만 오늘날 어디에 내놓더라도 그 예술적인 완성도가 뒤처지지 않는다.

해방 이후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등에 의해 차문화는 계승 발전하게 되었고, 1980년대에 한국제다와 현재 아모레 퍼시픽인 태평양화학과 같은 대기업이 차시장에 뛰어들면서, 차의 대중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세계적으로 차시장은 그 규모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캐나다는 차시장이 커피 시장을 앞질렀고, 미국 포브스에 따르면 미국의 청년들도 커피를 버리고 차를 선택한다고 보고한 바 있다. 우리나라도 젊은 세대의 차에 대한 관심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일상의 한 부분을 차 한잔으로 채우며 코로나로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가져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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