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의병사령부 국사봉과 의향 금정

심심풀이 우리역사
‘꼭 알아야할 영암 의병의 역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1년 02월 07일(일) 23:30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구한말 의병운동은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나눈다. 의병의 시작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188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을 계기로 척암 김도화(안동 출신. 의금부 도사. 애국지사 이상룡의 고모부)가 첫 기치를 들었고, 1905년 11월 17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면암 최익현이 ‘개문입적’의 ‘위정척사론’으로 호남 유생들을 독려, 노사 기정진의 ‘양물금단론’과 격문이 기폭제가 되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전라도 의병의 불길을 지폈다.

1907년 헤이그 사건 후 정미조약이 강압으로 체결되어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구식 군대가 해산되면서 참령 박성환이 자결하자 그 여파는 호남의병에 불길로 번져 면암의 제자인 임병찬(전북 임실), 고광순(고경명 후손. 고종으로부터 밀지 ‘애통론’ 받음), 기우만(노사 기정진의 손자), 기삼연(기정진의 제자) 등이 ‘호남창의회맹소’를 설치, 그 후에 심남일, 김준, 김율, 조경환, 강무경, 안규홍 등이 계승. 전라도 의병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해 점점 체계가 잡힌 의병 활동이 전라도 곳곳에 전개되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밤이 되면 왜놈들은 십 리도 못 가서 의병들에게 살해될 정도였다 한다.

이에 일본제국은 깜짝 놀라 ‘전라도 대토벌 작전’ 계획을 치밀하게 수립하여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55일간) 3기로 나눠 보병 2,260명에 함정 2척을 동원 해안선을 봉쇄 후 일명 ‘회오리 전법’으로 전라도를 4개로 분할 샅샅이 수색하고 민가를 불태우며 전라도 의병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그 이전부터 전라도 의병들은 덕룡산 부근으로 모여들어 국사봉, 채일봉, 분토, 내산 등 거점을 이동하며 상호 간 연계해 투쟁을 계속했다. 특히 해발 614m의 국사봉은 사방이 트인 천연요새의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여 호남 의병의 사령부 구실을 했다.

총대장 함평 출신 심남일 장군 휘하로 강무경, 박평남이 선봉장이 되고 금정 출신들인 최재현이 중군장, 김선중과 김성재가 후군장, 조치덕이 좌군장으로 활약하고 우리나라 최초 여성의병 양방매¹⁾와 양성일 오누이도 의병으로 참여하는 등 1906년부터 1909년까지의 영암군 의병 참가자는 의병장 17명에 의병은 총 187명에 달했다. 그중에서 금정면 출신 의병이 핵심 간부인 중군장 4명을 포함 46명으로 25%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의병들이 폭도로 몰려 그 가족과 후손들이 고초가 심해지자 자기 조상과 친척들의 의병 활동을 쉬쉬해 숨겨진 의병까지 밝혀진다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 양방매 여사와 강무경 의병장 [사진=독립기념관]
1) 편집자 주 : 양방매(梁芳梅,1890~1986) 여사는 전남 영암의 선비 양덕관의 딸로 의병활동을 위해 영암에 온 강무경 의병장을 만나 혼인하게 된다. 그녀의 오빠인 양성일 선생도 의병활동에 나섰다. 아녀자는 위험하다며 집에 남으라는 남편 강무경 의병장의 만류도 물리치고 양방매 여사는 화승총을 들고 전남지역 여러 곳을 돌며 직접 전투에 까지 나섰던 열혈 의병이었다. 결국 부상을 입고, 심남일, 강무경 의병장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두 의병장은 곧 순국하게 되고 그녀는 부상에 나이 어린 여성이라 석방됐다. 이후 오랜 세월을 감내하며 그렇게 살다 생을 마감하지만 훗날 국립묘지에 강무경 의병장과 합장되었다.


2019년 8월, 현재까지 밝혀진 금정 출신 의병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정윤명, 김종두, 홍맹환, 박성율, 박병국, 박원중, 정순재, 홍경준, 양병선, 나평집, 김선중, 이희초, 이상길, 전원일, 민치선, 민자화, 민치황, 양성일, 양성수, 양권익, 임규재, 민치호, 나도환, 김태삼, 양재환, 김은식, 민치도, 강찬중, 이종연, 유치선, 김재선, 전사문, 정대성, 양방매, 조치덕, 최재현, 김득원, 김맹제, 최모홍, 최유홍, 최한용, 김원일, 나상집, 박현숙, 이종선 의병이시다.

의병장 4명에 의병 수가 46명. 이는 우리나라 그 어느 고장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면 단위로는 가장 많은 참여 기록을 세운, 자랑스러운 의향이 바로 우리 영암 금정이다. 또한 그 당시 금정면 주민들 모두가 의병들의 안전과 자금조달, 보급에 협조했다.

천연적 요새의 자연환경과 후한 민심이 본보기를 보여 훗날 한국 전쟁 때는 빨치산의 본거지로 국사봉 일대가 루트가 형성되어 금정면민들은 낮에는 경찰에, 밤에는 빨치산에 시달리는 고초를 심하게 겪었으며, 불행히 수천 명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 고장으로, 지금까지도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다.

▲ 국사봉을 중심으로 전개된 의병과 일본군 전투 현황

1908년 한 해의 의병 활동만 해도 강진 오치 전투, 금정 사촌 전투, 금정 이암 전투, 금정 농소 전투, 금정 용천 전투 등 십여 차례 전투가 금정면 일원이나 접경지에서 행해졌고, 화승총이나 죽창의 열악한 무기를 소지하고서도 기관총 등 현대식 영국제 무기를 소지한 왜군 정규부대와 경찰을 상대 해 왜놈 장교 3명과 왜병과 프락치 백여 명을 사살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고 군 단위에서 유일하게 일제가 겁을 먹고 영암에 중대 단위의 헌병과 경찰의 병력을 배치하고 혈안이 되어 토벌 작전 3기에는 야만적이고 무차별적인 토벌로 금정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지만, 의병들은 금정에서 자체적으로 군사훈련, 무기 제작이 이뤄졌고, 초개같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

일제의 사주로 순종에 의해 ‘의병 해산령’에 따라 할 수 없이 1909년 7월 21일 금정면 중산의 ‘고인동’에서 피눈물을 뿌리며 의병을 해산하기까지 금정면 일대는 곳곳마다 격전을 치렀던 대한민국 의병사에 유례없는 의병운동의 최대 본거지였고 의병 역사의 현장이다.

호남정맥의 한 줄기인 덕룡산과 국사봉, 채일봉, 안산 등 의병들의 전적지가 수없이 많은데도 그 장소도, 의병장과 참여 의병 수도 제대로 모른 채 서서히 기억이 잊혀 가고 그 무수한 고귀한 나라 사랑의 희생 대가는 고사하고 비문 한 점, 위령탑 하나 없이 그냥 이대로 방관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선열들에게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국사봉 [사진=픽사베이]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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