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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 대한 남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 단장이 즉사했고, 노무라 제3함대 사령관은 오른쪽 눈깔이 빠졌으며, 우에다 제9사단장과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 외무상이 되어 미주리 함상에서 맥아더에게 항복문서를 조인했던 시게미쓰 상해 공사는 다리 하나씩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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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어 주한 미국 초대 대사로 부임한 산초는 당시 주 상해 외교관으로 귀빈석에 참석했다가 폭탄 소리에 기절초풍. 몇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되살아났다. 무초는 폭발사건을 기획한 김구에 대해 앙심을 품고 본국에 김구 주석을 테러리스트로 단정, 악평의 보고서를 여러 차례 올렸다.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 하지에게도 ‘블랙타이거 김구는 욕심이 많고 미국의 국익에 저해되는 위험인물’이라고 부추겼다.
그 영향으로 맥아더와 하지는 미국에 거주했던 이승만을 1945년 10윌 16일 김포공항을 통해 대대적으로 귀국시켰으나, 김구가 이끌었던 상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존재는 부정한 채 개인 자격으로 1945년 11월 23일 요인 14명만 군산 비행장을 통해 입국시켰다. 뒤를 이어 김원봉 등 광복군 간부들도 초라한 모습으로 귀국했다.
미군정은 1946년 국방경비대 설치령을 공포 후 군사영어학교와 국방경비사관학교 1, 2기생을 모집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무슨 영문인지 국군의 양성보다는 치안 유지 요원 양성에 방점을 찍었다. 영어학교 교장으로 미군 소령 리스를 임명하고 부 교장에는 일본 육사 출신 중좌 원용덕을 기용, 광복군 간부들은 소외되었다.
광복군은 맥아더 사령부에 대한 실망과 친일파 소굴 만주사관, 일본육군사관 출신들과는 함께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입교를 거부해 군사영어학교와 국방경비사관학교 1, 2기생의 구성은 대부분 북에서 넘어온 백선엽 형제같은 친일파에 김일성이 싫어 남하한 서북청년단 출신들과 만주에서 독립군을 괴롭힌 김창룡 등 헌병보조원들이 차지했다.
군사영어학교의 입학생 110명 중 일본육사출신 87명, 만주사관학교 출신 21명, 기타 출신은 2명이다. 졸업생 110명 중 장군이 68명이나 배출되었고 서북청년단 출신들은 채병덕-한신-선우기성-안두희로 그 인맥이 이어졌으며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했다.
그 후 정치적 라이벌 김구가 비명에 서거하자 이승만은 4월 3일 제주에 서북청년단 출신만으로 부대를 편성 양민을 잔인하게 사살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제주 4.3사건’이다. 5.18 민중항쟁 때 일부 진압군이 서북청년단 출신 휘하 부대였다는데 확인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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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참총장도 초대 이응준 소장부터 21대 이세호 대장까지 서북청년단 출신과 친일파가 군권을 장악했으며 친일파 이응준은 ‘계림회’를 조직, 친일파의 리더 역할을 했고 전두환이 모방해 ‘하나회’를 만들어 12.12를 단행해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이처럼 중국 신경군관학교 출신에 OSS 특수훈련까지 이수했던 김원봉, 장준하 등 광복군 출신의 최고급 간부들이 국군 초기 조직에 합류해 건국 초기의 국군을 바르게 이끌어야 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
반면 해방이 되자 갈 곳 없어 잠시 광복군 중위로 온갖 수모를 당하며 근무한 박정희는 일본육사 우등생에 2개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도 자존심을 과감히 버린 채 국군경비사관학교 2기로 늦게라도 입교해 졸업 후 교관을 자원하여 인맥을 형성, 쿠테타에 성공,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광복군의 리더 격인 장준하와 김원봉은 친일파 출신들에게 되치기당했고 대부격인 백범 김구의 울타리 역할도 제대로 못 했으며 반체제 인사로 낙인이 찍혀 그 후손들마저 고초를 당한 삶이 매스컴에 오르내려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