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기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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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기생 이야기
- 심심풀이 우리역사
  • 입력 : 2021. 03.15(월) 21:14
  • 영암일보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조선은 성리학을 섬긴 유교 국가다. 반상의 신분제도가 엄격한, 양반이 아니면 도저히 살기가 힘든 사회였다. 특히 왕족, 양반, 중인, 평민, 천민으로 분류되는 조선의 5가지 신분 중에서 기생은 백정, 광대와 같은 가장 낮은 신분인 천민에 해당됐기에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았다.

‘해어화’,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 일컫는 기생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고구려 벽화에 처음 무녀가 등장하였으며 신라 진흥왕 때 원화, 백제 시대에는 ‘꽃쟁취’라 불리는 기생군단이 형성되었다.

▲ 기생

조선 시대 화류계를 주름잡았던 자들은 대부분 재물이 많으면서 할 일 없는 왕실의 종친들이나 고관대작, 거상, 한량 등 특수층들이었다.

궁중의 기생은 무반 출신인 액정서나 장악원 소속 대전별감이 관리하였다. 당시 무과에 급제하고도 벼슬이 없는 한량들이 이들에게 잘 보여 승차하거나 벼슬 한자리라도 따내기 위해 기생집을 많이 드나들면서 ‘한량질’이라는 말도 생겼다. 또 조선 시대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기에 고관대작 양반들이 야간에 기생을 부르려면 기생을 호위하는 대전별감을 통해 야금을 패스할 수 있었다.

원래 기생은 지방 출신이다. 평양기생, 진주기생은 있어도 서울기생은 없다. 지방 기생이 정기적으로 한양에 파견되는데, 궁중 무용수들로 화장하고 옷을 해 입는 데 큰 비용이 들었었다. 여기서 경비 조달 방법으로 시작된 수청이 논란이 일었다. 세종 때 평안감사 윤곤과 변계량의 두 달에 걸친 논쟁 끝에 기생에 대한 수령이나 토호들의 성적 노리개 관행을 금지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성종이 이를 경국대전에 명문화시켰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화류계인 기생들의 세계도 3종류로 구분한다. 첫째를 꼽는 1패로, 관청에서 연회를 베풀거나 관아 수령의 부름에 응해야 하는 관기(금기)이다. 장악원 소속의 요즘으로 치면 국립예술단원으로 궁중 연회에 동원되었다. 8도 감영이나 230여 고을 관기들도 연회에 나가는 일이 주 업무이며 고을수령이나 외국사신이 아니면 공식적으로는 몸을 파는 일이 없었다. 다음은 2패인, ‘은근짜’의 일반기생으로 기방이나 권번에 속한 시, 서, 화의 재능을 갖춘 기녀들이다. 은근짜의 어감 그대로 맘에 맞는 상대가 있으면 가능했다. 마지막 3패인, ‘노류장화’, ‘들뱅이’라 불리던 3류 기생이 있다. 작부라 불리며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 그림을 그리고 있는 기생

본디 기생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1패의 관기나 2패인 ‘은근짜’를 말한다. 기생의 머리를 올려주는 ‘화초’ 의식은 당시 한양의 기와집 한 채 값 정도였다. 정 3품 이상의 당상관이나 거부가 아니면 언감생심이었다.

조선 3대 기생으로는 송도삼절 황진이, 부안의 매창, 함경도의 홍랑이라 할 것이다. 모두 한시를 짓는 재주와 악기를 다루는 특기에다 빼어난 미모까지 지녔다. 기생의 신분에도 천박한 사랑을 하지 않은 고매한 인품을 지키며 예술과 풍류를 아는 자가 아니면 정을 주지 않은 원칙과 절개를 고수한, 사랑의 가치를 알고 행동했던, 자랑스러운 조선의 기생들이다. 이들이 조선의 여류문학을 주도했다.

▲ 황진이

특히 ‘황진이’는 뛰어난 미모와 춤, 악기를 다루는 재주, 청아한 음성, 사내같은 활달한 성격을 갖춘 후 자기의 존재가치를 폄하했던 30년 면벽 수도승 지족선사와 왕족인 벽계수 이강수를 보기 좋게 녹다운시키고, 소쇄양, 이사종, 이생, 이지함의 정인이 되어 ‘청산리 벽계수야’ 등 8수의 시조를 남겼다.

개성 유수였던 담양의 면앙정 송순 대감이 머리 올려준 첫 남자였다고 전해지나 확인할 길은 없고 우리나라 최초로 계약 결혼을 한, 한 사내에게 종속된 여인이 결코 아니었다.

인습과 세속에 얽매이지도 않았으며 고정관념을 탈피한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이 드리워진 거기에다 사향을 몸에 늘 지닌 채 모성적인 본능과 원초적 사랑을 마음껏 펼치다 37세에 굶어서 요절한 비운의 로맨티시스트였다. 그녀의 구별됨은 절대로 사랑의 파트너를 자기가 선택했지 절대 선택당하지 않는 독특한 취향의 여인이었다는데 방점을 찍는다.

매창은 영의정 박순의 수제자로 천민 신분인 ‘조선의 풍월도’라 칭했던 장례전문가 촌은 유희경을 사랑하고, 정인인 유희경은 서얼의 신분을 탈피코자 임진왜란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워 면천되어 한성판윤(정2품)까지 오른다.

매창은 한 번 정 주고 떠난, 소식 없는 님을 찾아 천리길 한양까지 찾아갔건만 끝내 만나지 못한 그 심경을 읊은,

“이별이 너무 서러워 중문 걸고 들어앉으니(離懷消消掩中門)
비단옷 소매엔 향기 없고 눈물 흔적뿐이네(羅袖無香滴淚痕)
홀로 있는 깊은 규방 외롭기만 한데(獨處深閨人寂寂)
뜰에 내리는 보슬비는 황혼조차 가리네(一庭微雨銷黃昏)

그리워도 말못하는 애타는 마음(相思都在不言裡)
하룻밤 시름으로 흰머리 반이로다(一夜心懷半絲)
저의 고통스러운 마음 알고 싶다면(欲知是妾相思苦)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소서(須試金環滅舊圓)”
의

“규원”이라는 연정가 한 수 남기고 오직 유희경만을 그리다 저세상으로 외로이 먼저 떠났다. 훗날 희경은 매창의 묘소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울부짖었건만 때늦은 허무애의 독백이었다. 또 매창이 희대의 바람둥이 허균의 온갖 유혹에도 허균을 설득시켜 10년을 깨끗한 글 벗으로 사귄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의 시조는 부안 매창공원에 건립된 수많은 시비가 보여주듯 ‘취하신님께’를 비롯한 주옥같은 시 56수를 남겨두고 갔다.

▲ 매창_취하신님께

‘묏버들 시인’ 홍랑은 함경북도 경원 기생으로 내 고향 영암 출신 삼당시인 고죽 최경창을 만나 뜨겁게 사랑타가 목숨을 건 ‘분경’의 국법까지 어기면서 한양 땅 정인의 병간호를 하였고, 고죽이 객사하자 3년간의 시묘살이 후 고죽을 그리며 고죽의 문집을 만든 후 정인의 묘소 앞에서 뒤를 따라 자결해 훗날 최씨 문중과 조선 사회에 큰 감명을 주면서 기생의 신분으로 최씨 문중 선산에 최경창과 함께 묻힌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대단한 여인이었다. 품격 높은 “묏버들 가려 꺾어” 등 사랑을 노래한 환상적인 시들이 전해지고 있다.

▲ 홍랑 묘비 뒷면. 최경창과 홍랑의 사연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인간적 고뇌와 모진 울분 속에 에누리 없는 유교적인 조선 사회에서 나이와 신분을 과감히 초월하며 사랑하고 지키다가 연정가 한 수 남기고 미련 없이 목숨을 던진 매창과 홍랑, 진이를 진정 아름다운 조선의 3대 기생으로 꼽는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