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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밤하늘에 별을 보며 사랑을 약속하던 곳.
그 옛날 목화밭 목화밭 목화밭
‘하사와 병장’이라는 듀엣 가수가 불렀던 이 노래는 그 당시 상당히 많이 불리어진 곡으로 기억되지만, 솔직히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께서 목화 때문에 고생한 것을 떠올리면 터무니없는 노랫말이라고 말할 수밖에.
그 키가 허리춤밖에 되지 않는 키 작은 목화밭에서 사랑타령이 웬 말이며 깔깔한 목화밭에 둘이 앉아서 소곤거리는 것은 한없이 불편할 뿐이다.
봄이 되면 할머니는 늘 한숨과 함께 호미자루를 쥐고는 그랬다.
“이 썩을 놈의 미영 또 심네.”
그 이야기를 하자.
목화씨를 심고, 싹이 나고, 잎이 점점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꽃이 진 자리에 푸른 열매가 동그랗게 열리면 우리는 가끔 그것을 까서 먹기도 한 것 같다.
여름이 갈 때쯤 목화밭은 목화열매가 부풀어 올라 갈라지면서 온 밭이 서서히 하얀 목화솜이 되어 우리 집 식구들은 땅 가까이 피어 있는 목화송이가 땅에 닿아 더러워지지 않도록 위로 치켜 올려 묶기도 하였다. 목화밭이 어느 정도 하얗게 변하면 할머니는 우리에게 대바구니를 하나씩 던져주고 목화를 따오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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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목화솜을 2, 3일에 한 번씩 따서 마루에 쌓아놓았다. 그리하여 그 일이 끝나고 나면 목화 줄기를 잡고 뿌리와 함께 뽑아서 비가 맞지 않는 처마에 쌓아두었다. 그것은 가을 끝이나 겨울 내내 훌륭한 불쏘시개가 되었다.
할머니의 일은 거기서부터였다. 그 목화솜을 씨아라 했든가 씨앗이라고 했든가. 목화솜을 넣고 돌리면 원통의 나무가 맞물려 있어 목화솜은 빠져나가고 목화씨만 앞으로 툭툭 떨어지는 기게였는데, 할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내내 씨를 빼는 일만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니 불알 씨앗에 넣고 돌려분다이”하고 엄포를 놓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이 끝나면 할머니는 솜틀에 넣고 솜 타기를 종일하셨고, 솜 타기가 끝나면 작은 대나무 막대기에 이제 솜 모양을 갖춘 목화를 둥글게 말아 가래떡 모양이 되면 쑥 빼어 마루 가득 쌓아놓았다.
물레를 잣는다.
바르르 돌아가는 실패에 말아놓은 목화솜을 오른손으로 물레를 돌리고 왼손으로 실을 자으면서 할머니는 아마 설운 노래를 웅얼거렸던 것 같다.
대충의 실이 만들어지면 여러 가닥 실을 한쪽은 마루기둥에 묶고 한쪽은 사랑채 기둥에다 묶어, 가닥가닥을 큰 참빗처럼 생긴 틀에 끼우고, 한쪽에서부터 풀을 메기면서 화로에 불을 담아 풀빗으로 쓸어가며 말리기를 여러 차례 하여 만들었다.
하루 종일 밭에서 김을 매고 온 할머니는 희미한 초꼬지불을 앞에 두고 밤새 길쌈을 한다. 베틀에 앉아 씨줄이 떨어지면 침을 발라 잇고, 두 발로 날줄을 담은 채를 타가닥 한번 옮기고 타가닥 한번 옮기고 하면서 씨줄 틀을 두어 번 꽉꽉 눌러 천을 만들어 가며 또 설운 노래를 읊조리며 밤을 보냈다.
다 만들어진 천은 어머니와 밤중 내내 타닥타닥 타다닥 방망이질로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러저러할진대 어떻게 목화밭에서 사랑놀이를 한단 말인가.
실을 잣는 일이 어디 그것뿐이랴.
모시는 목화보다 훨씬 일이 더 많았으며, 모시가닥을 잇느라고 할머니의 허벅지는 얼마나 퍼렇게 멍이 들었던가. 비단을 만들려고 그 모내기철에 누에 키우기는 또 얼마나 고되었으며, 누에고치를 삶아서 실을 뽑을 때는 날씨는 왜 그렇게 더웠으며, 그 더운 여름 베짜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아, 시집 와 남편 사랑 제대로 못 받고 일찍 홀로 되시어 집안일에만 치이어 평생을 고생하다, 자신이 만드신 모시옷을 입으신 채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 책 <추억의 사립문> 중에서
박석구 시인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2016년 광주 지송시회 8인 시 『연푸른 그늘에 앉아』 공저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