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의 비극 제주 4.3사건

기고
민족 최대의 비극 제주 4.3사건
심심풀이 우리역사
  • 입력 : 2021. 04.04(일) 00:16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제주 4.3사건’이 발생한 지 74년이 되었다. 이 사건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가 매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일어난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거나 다쳤고, 생활의 터전마저 잃어버렸다.

그동안 쉬쉬하다가 1980년대 후반에서야 진상규명 작업이 거론되었으며 2000년대에 이르러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보상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그 진위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 사건의 발단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일제가 패망하고 주둔했던 일본군이 철수, 일본 등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자 제주도는 급격한 인구변동을 겪었다. 이들은 직업도 구하지 못한 채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웠고,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생으로 이들 중 수백여 명이 죽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준비되지 않은 미군정의 어리숙한 미곡 정책의 실패로 사상 최악의 식량난이 겹치면서 제주도는 그야말로 유례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을 정도라 민심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게다가 일제에 부역한 친일 경찰들이 맥아더 포고문에 의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로 복귀하면서 추호의 부끄럼도 없이 미군정관리들의 하수인이 되어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정행위들을 일삼으며 온갖 추태를 내보였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행사 후 군중들이 가두시위를 하는데 시위행렬을 구경하던 한 어린아이가 시위대를 헤치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방치하고 경찰서로 돌아가 버린다. 이에 분개한 제주도민 일부가 제주경찰서로 달려가 항의하자 사죄는커녕 총기 발포라는 강제진압을 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가 되었고 민심은 크게 동요하였다.¹⁾
1) 편집자 주: 2003년 정부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총기 발포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여기서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사망자들이 시위대와 관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도 이들의 발포를 비이성적이라 규정할 정도였다.

1947년 3월 14일 제주에 내려온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 3·1사건이 폭동이라며 다른 지방의 경찰을 대거 투입하여 물리력으로 무질서한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²⁾
2) 편집자 주: 이에 앞서 1947년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총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심지어 미군정청 통역단에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까지 파업에 참여하였다.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3월 15일에는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여 3월 18일까지 약 200명이 검거되었으며 취조하는 과정에서 모진 고문도 자행하였다. 제주도의 총파업 사태는 3월 말에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경찰 당국의 무차별적인 대량 검속이 진행되어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약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다.

3·1 발포사건 이후 지역 주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1947년 3월의 우도 사건과 중문리 사건을 위시하여 6월의 종달리 사건, 8월의 북촌리 사건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1946년 6월 3일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언급한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시작으로 국내 정치는 혼란이 계속되었고 1947년 11월 14일 미국이 주도한 유엔총회는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통과시켰다.

이 안이 소련의 거부로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대두되었고,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되리라는 우려에 좌파 진영뿐 아니라 백범 김구 등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 격렬히 반발하였다.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의 일환으로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전국에서 총파업을 일으키는 이른바 ‘2·7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제주에서는 2월 8일부터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2월 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이 참석한 신촌 회의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논쟁 끝에 12 대 7로 불행히도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었다.

게다가 3월에는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 1947년 3월 제주경찰서 앞 기관총을 거치하고 시민진압중인 경찰

▎ 사건의 전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도 습격하였다.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 구국 투쟁을 무장봉기의 기치로 세웠다.

무장봉기 초기에 미군정은 이 사태를 경찰이 담당할 치안 문제로 파악하였다. 미군정은 4월 5일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제주도 도령을 공포하여 제주의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였다.

4월 8일에는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이 무장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4월 10일에는 국립경찰 전문학교의 간부후보생 100명을 제주에 파견하여 경찰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응원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힘으로 진압한다는 방침은 도민들의 큰 반발을 사게 되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4월 17일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낀 미군정은 경비대 제9연대에게 경찰과 협조하여 진압 작전에 참가하도록 명령하였고, 18일에는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휘부와 교섭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4월 28일에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72시간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할 것 등을 합의하였으나 5월 1일에 우익 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되었다.³⁾
3) 편집자 주: 현재 밝혀진 오라리 방화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오라리 마을은 4.3 무장반란 이후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익청년단원들이 마을로 난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마을 주민들은 불을 끄려고 했고, 무장대는 청년단원들을 쫓아갔으나 충돌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온 경찰은 이미 떠나버린 무장대를 추격하지 않고 오히려 불을 끄려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을 쐈고, 이후 경비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나버렸다.

▲ 제주 오라리마을 방화사건

방화사건 직후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 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였다. 미군정은 오라리의 방화 현장을 지상과 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하도록 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기록영화를 만들었고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는 데 이용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경비대에 무장대를 총공격하도록 명령하였고, 이로부터 경찰 중심의 진압 작전은 경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군정이 강경 진압으로 선회한 것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는 데 주력한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엉터리 결정 때문이었다.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고,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강경 진압을 계속하면서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으며, 6월 18일에는 화평책을 추진해온 김익렬이 전격 교체되고 경비대 연대장으로 부임해 강경 진압 작전을 펼치던 박진경 대령이 부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초대 제주지사 박경환, 김익렬 중령, 독립운동 출신 문형순 총경도 강제진압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진압작전 출동을 거부한 국군 14연대의 일부 좌익군인들에 의한 여순사건까지 발발해 전라도 남부지방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후 송요찬⁴⁾, 유재흥 등 군의 회유공작과 강제 진압작전으로 무장대 숫자는 급격하게 감소하여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⁵⁾⁶⁾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강경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을 병행하여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이 하산하였다.
4) 편집자 주: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중간산마을(산쪽에 위치한 마을) 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5) 편집자 주: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6) 편집자 주: 이 과정에서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제주4.3사건에서 벌어진 무차별적인 대학살의 절정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진 것이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그런가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代殺)’과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특히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개신교도,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악명이 높았다. 물론 이 끔찍한 학살행위가 비단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외치며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에서는 무장대에 의해서 군경토벌대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수는 4.3사건 총 희생자의 약 10~20%(대략 3,000~6,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쉽게 말해 당시 제주도에서는 낮시간에는 서북청년단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빙자한 학살을 하고, 이들이 저녁에 해안가 주둔지로 철수한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양민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 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 중산간지대에 피신한 제주민들

▲ 제주4.3사건 희생자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었다. 이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된 셈이었다.

하지만 4.3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는데, 그 숫자는 약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 사건 이후

사건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청으로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그해 8월 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하여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

위원회는 진상조사 결과,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전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 2008년 제주공항 활주로 옆에서 무더기로 발굴된 4.3유해



월봉 김오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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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학회 회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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