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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엽의 첫째 부인이 1남 1녀를 낳고 요절하자 두 번째 부인을 들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 막내가 바로 교산 허균이다.
형제인 허성, 허봉, 매형인 우성전, 김성립, 동서 이수광 등은 모두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로 모두 조정의 요직을 차지해 서로 멘토가 되어 눈높이를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허씨 일가가 당대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할 정도로 남인에 속한 명문가였다
열두 살에 아버지 허엽이 세상을 떠나고 이복형 허성이 집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허균은 아홉 살 때부터 시를 지었고, 허난설헌으로 알려진 누나 허초희도 시 짓는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특히 누나와 사이가 좋았는데 누나가 결혼을 하자 매우 적적해하며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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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처음에는 서애 류성룡에게 배우다가, 나중에는 둘째 형 허성의 친구인 손곡 이달에게서 배웠다.
이달은 서자 출신이기는 했으나 이름난 천재 시인으로 우리 영암 출신들인 고죽 최경창과 옥봉 백광훈과 함께 당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삼당시인의 한 사람이다. 서자는 과거를 치를 자격이 없다는 서얼금고법 때문에 평생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에 취해 울분을 터뜨렸다.
그런 스승 이달을 보면서 성장한 허균은 조선 사회의 불합리성에 대해 느낀 바가 커 훗날 ‘홍길동전’을 남겼고 조선의 이단아가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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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18세에 생원시 장원을, 25세에는 1594년 문과에 급제해 일찍이 출세 가도를 달렸지만 자유분방함과 일탈행위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존경을 받던 이율곡의 행적을 비난해 반대당 서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유배를 6번이나 갔고 감옥도 3번 갔으며 파직도 6번 당했다.
그런데다 유난히 따랐던 형 허성의 죽음과 누이 허난설헌까지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고 임진왜란이 터져 사랑하는 부인 김씨마저 피란 중에 첫아들을 낳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주변의 계속되는 가문의 비극에 임진왜란과 정쟁으로 허균은 멘탈이 무너져 아웃사이더로 변모해 갔다.
1597년 28세에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나 서울에서 기생을 데리고 와 노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의 눈에는 오히려 위선에 찬 조정의 대신들이 더 썩어 보였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의 집에는 서얼 출신 문인들이나 승려, 무사들이 드나들었다. 허균은 이런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조정의 부조리를 한탄했고, 급기야 서출인 서양갑 등과 함께 서출에게도 과거의 기회를 주라는 상소를 했다. 그러다 ‘칠서의 옥’에 연루되어 큰 고초도 겪었으며 조정에서는 허균을 곱게 보지 않았고 ‘막된 인간’이라며 왕따를 시켰다.
관직에서 점점 멀어진 채 강원도 금강산에 머물면서 병서를 읽고 후일을 도모했고, 불경을 외우고 염불을 암송하는 행동을 해 벼슬길에 오르다 쫓겨났다.
좌충우돌의 행동을 제어할 친구도 선배도 점점 사라졌다.
허균은 최후 수단으로 북인 이이첨을 찾아가 형조 판서, 좌참찬에 올랐지만 계속되는 권력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눈치를 살피며 힘든 줄타기를 했다.
그가 좌참찬이던 1617년, 인목대비의 폐비 논의가 일어났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의 계비로 영창대군의 생모였다.
나이는 광해군보다 열 살 아래였는데 인목대비의 아버지와 자식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인목대비의 폐비론에 남인세력들은 대부분 반대편에 섰는데 유독 허균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폐비론에 앞장섰다.
폐비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이원익, 이항복은 유배를 떠났다. 이에 허균에게 앙심을 품은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렸다. 허균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1618년 8월 10일 새벽, 남대문에 격문이 붙었다. 불쌍한 백성을 위해 광해군을 제거할 것이니 모두 도성에서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격문이 허균의 심복 현응민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사건의 배후자로 허균이 지목되고 조정에서는 허균을 처형하라는 대신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특히 당시 권력자인 간신 이이첨은 허균을 처형하라고 광해군을 압박했다.
허균의 주변 인물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 끝에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조정 대신들도 허균을 처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허균에게는 변론의 기회조차 없었다. 자백도 판결문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삼복계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허균에게는 이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지 못한 채 토사구팽되어 1618년, 쉰살의 한창 나이에 능지처참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허균의 몸은 여섯 토막으로 찢겨 각지로 보내져 경계로 삼았으며, 재산은 몰수되었고, 직계가족 중 남자들은 모두 사형당했다.
허균은 비록 대역 죄인으로 죽었지만 그를 따르던 백성들도 많았다. 잘린 허균의 머리를 수습하려다 잡혀간 사람도 있었다. 그가 처형된 뒤로도 몇 달 동안 그를 따르던 이들이 계속 잡혀 들어갔고 귀양을 가거나 고문 끝에 죽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인조는 광해군 시절 역모죄로 처형되었던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켰으나, 허균만은 조선왕조가 무너질때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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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허균은 분명 풍류남아였고 혁명가였다.
10년 글벗인 부안 기생 매창이 죽자,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라는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명한 시를 지어 비문을 남겼다.
또한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유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며 자유분방한 풍류적 생활을 추구했다.
허균은 ‘호민론’을 통해 위정자들에게 경고하면서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결국 ‘홍길동전’을 탄생했다. ‘성소부부고’에는 학문의 목적과 진위를 논한 ‘학론’을 비롯해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병론’이 있으며, 허균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한 ‘유재론’에서는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한 것으로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문대작’이라는 음식 백과사전도 써서 팔도의 음식을 분석한 미식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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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젊은 시절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북경에서 일찍이 천주교 신부들을 만나 천주학을 접하고 평등사상을 깨달아 고민했기에 절대 건들지 말아야 할 성리학의 모순과 신분제도의 철칙까지 건들다 되치기당한 것이다.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산 허균의 죽음과 역모에 대해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