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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 왕후 강씨에서 27대 순종비 순정효왕후 윤씨까지 추존 왕비를 제외한, 실존 왕비는 3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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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이 내명부 체제를 개편, 왕비는 오직 1명의 일부일처제를 시행했다. 왕비를 1명으로 제한한 까닭은, 아버지 이성계가 고향 함경도와 개경에 1명씩 부인을 둬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후궁 출신의 마지막 왕비는 장희빈이다.
왕비의 호칭은 왕비의 거처 중궁전(교태전)에서 유래된, 중전, 중궁, 내전, 곤전, 곤궁 등을 사용했다. 조선 말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중전마마’에서 ‘황후폐하’로 불렀다.
조선의 역대 왕비에는 이씨가 없다. 동성동본 간의 혼례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었다. 오얏 이씨 성을 가진 규수는 아예 간택의 대상에서 빼 버렸다.
왕비는 왕이 승하하면, 대비가 되어 자경전에 머물며 때론 수렴청정한다. 조선 말기에는 순조, 익종,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자 대비들이 많았다. 철종 대에는 순조비 순원왕후, 익종비 신정왕후, 헌종비 효정왕후 등 3명의 대비가 함께 생존했다.
왕비는 왕의 정실이자 국모로서 내명부를 관장하며 궁 안 살림을 책임지는 실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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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공개구혼 ‘간택령’을 내려 후보자 신청을 받았다. 왕비 간택령이 내려지면 8도의 15~20세 양반가 규수들은 ‘단자’라 불리는 사주팔자를 적은 종이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일부 양반들은 딸을 숨겨 간택을 꺼렸다. 왕실의 사돈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자칫하면 목숨 부지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보통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간택을 주관했으나 왕이 직접 간택한 예도 있다.¹⁾
1) 편집자 주: 간택이 생기게 된 원인에는 이속(李續)이라는 인물과 관련이 깊다. 처음 등장은 1417년 9월 2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의해서이다. 태종이 후궁 소생의 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기 위해 점쟁이를 시켜 그 짝을 찾는데, 이때 이속이 사주를 알아보러 온 점쟁이를 쫓아내면서 “내 아들을 몸종의 딸에게 장가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 정신옹주의 생모인 신녕궁주 신씨는 본래 출신이 몸종이고, 정혜옹주의 생모인 정의궁주 권씨는 명문가 안동 권씨 가문의 규수였으니, 쉽게 말해 “몸종 출신의 후궁 딸을 며느리로 맞는 건 나랑 급이 안 맞으니, 정 나와 사돈을 맺으려거든 명문가 출신의 후궁 딸을 보내라!”고 망언을 한 것이다. 태종이 누군가. 형제 둘을 죽이고 한 명을 귀양보내는 피의 숙청과 두 번의 정사를 치르고 왕위에 오른 킬방원이 아닌가. 그런 태종을 상대로, 그것도 자신이 지극히 총애하는 후궁과 그런 후궁의 딸이자 엄연한 왕의 핏줄인 옹주까지 싸잡아 무시한 언사였기에 이에 대해 대단히 분노한 태종은 이속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린다. 그런데 이번엔 의정부와 육조 신하들이 들고일어나 무한 상소를 올리니 이에 태종은 이속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급기야 관노로 강등시킨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평생 금혼령, 쉽게 말해 한평생 솔로부대에서의 복무를 명받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신하들이 이속의 신상털기에 들어갔고 이속의 당숙과 기타 친척들은 풍기문란을 이유로 곤장행 등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이로 인해 이속의 당시 망언은 말 한마디에 패가망신을 당한 조선 역사의 대표적 케이스로 자리잡게 된다. 이 사건 이후 기존과는 다른 선발 방식을 만들라는 태종의 명에 의해 간택령 제도가 처음 만들어지게 된다.
왕비에게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왕통을 이을 후계자 생산이다. 왕비는 출산까지이고, 수유와 육아는 봉보부인인 유모가 맡았다. 왕실의 왕자들은 길게는 10세, 적어도 5~6세까지는 젖을 먹였다.
왕비의 삶은 겉으로는 호화스러워 보였지만 궁중의 여인들 간 심한 암투로 마음고생이 심했고 정치적 풍랑에 휩쓸려 비극적 삶을 살다간 성종의 폐비 윤씨,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 등 불행한 왕비들도 있었으며 왕비의 수명은 51세로 비교적 단명했으나 왕들의 평균수명 47세보다는 더 길었다.
‘선원록’에 등재된 왕비 36명과 ‘유부록’에 등재된 후궁은 138명, 왕의 여자들은 총 174명이다. 드라마에서는 후궁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잘못 비치고 있으나 실은 왕 1명당 5명의 후궁을 거느린 셈이다.
왕비와 후궁들이 출산한 자녀 수는 총 273명이고 왕비에게서는 93명, 후궁들이 180명을 출산했다. 왕 1명이 평균 10명의 자녀를 둔 셈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13명 이상 자녀를 낳았을 때 본분을 다한 왕으로 평가되었으며, 랭킹 1위는 29명을 둔 태종 이방원이요. 다음은 28명을 낳은 성종 이혈이다. 쇠고기를 즐겼다는 세종 이도는 아들 18명에 딸 7명을 낳아 아들 신기록을 세웠으며, 채소 반찬 1식 3찬을 고집한 영조는 2남 14녀를 낳았다. 정신적으로 불안하거나 병색으로 골골한 인종과 경종, 순종은 후사가 단 1명도 없었다.
후궁을 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왕실 번창이 목적인데 왕비의 평균 출산율이 3명 정도인 점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로서 출산율이 저조한 까닭은 궁 안의 법도가 엄격해 한 달에 왕비의 합궁일은 겨우 4~5일밖에 안 되었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는 서인 일당 독재의 장기집권과 음모로 왕비나 세자비로 입궁을 두려워했으며 내명부의 질서 확립이란 명분으로 목숨 부지가 힘들어 후궁마저 쉽게 둘 수도 없었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맘에 든 후궁 하나 취하려다 명성왕후 김씨에게 뺨까지 얻어맞은 야사도 전한다. 이리하여 왕비인 정실에게서 낳은 큰아들인 적장자가 왕통을 이은 경우는 7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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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에게서 적통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는 합궁의 금기사항이 너무 엄한데다가 왕과 왕비가 운동을 게을리한 탓의 비만은 물론 권력의 암투와 복잡한 내명부들과 후궁들의 질투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해 울화병까지 얻곤 했다.
게다가 합궁을 제한한 날들이 너무 많았다. 번개 치는 날, 안개 낀 날, 비 오는 날, 초하루 날, 그믐날, 보름날, 뱀날, 호랑이날 등 소위 손이 낀 날이라고 정해 무조건 왕비와의 합방을 금지했다. 파트너인 왕 또한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린데다 복잡한 합궁 절차에 합궁의 분위기도 문제였다.
합궁 시에는 늙은 침방상궁 3명이 가려진 발 밖에서 복상사를 방지한다는 궁중법도에 따라 도마위에 칼과 장닭을 준비해 놓고 합방이 마칠 때까지 밖에서 대기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고 한다.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어 처음으로 왕을 모신 궁녀는 겉치마를 거꾸로 뒤집어 입어 승은을 받았음을 표시했고, 내명부의 직첩 숙원이 내리기까지 행동을 근신해야 했다.
왕비의 선발도 용모와 인품보다는 거의 가문 위주로 선발된데다 조선 전기에는, ‘이씨인 목을 김씨인 금이 해친다’하여 김씨 성의 여성은 무조건 제외되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 의하면, 1623년 4월 11일 ‘인조반정’ 후에는 인조부터 순종까지 왕비 20명 중 서인 노론 가문 출신이 17명을 차지해 대부분 국혼이 정략적으로 이뤄져 당사자인 국왕의 선호도가 묵살되었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인조반정 후 ‘국혼물실’을 맹약해 서인 측 집안에서만 왕비를 배출했던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 국왕 순종을 ‘대공’ 또는 ‘이왕’으로 호칭, 조선의 왕과 왕비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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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