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대화가 시작된다. 자세히 보세요. ‘마한 금동관이구먼’ 그렇습니다. ‘그런데 구슬이 저 색깔이었는지는 고증이 안 됐을 거여, 차라리 없는 게 기품이 있어 보이지 않을까?’ 파리에는 전문가도 구분 못 할 만큼 명화를 복제하는 공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우리의 문화재라면 좀 허접하지 않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영암에서 찾아봐’ 전시하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암은 마한의 본거지야. 오늘날 왕곡을 그들의 중심으로 비정(比定)할 경우, 주산이 금성산이고 월출산이 조산이지. 그 축으로 고분이 조성되며 내동리 쌍무덤 등 시종에도 많잖아. 그런데 왜 마한은 항상 나주 중심이어야 하는지.’ 그런가요? ‘영암은 고대부터 왕인, 도선, 최지몽 등 인물이 많아. 독자적이었냐 아니면 나주와 연결되어 있었느냐의 차이는 있지. 워낙 기록이 없다 보니, 고증이 힘들기는 해. 하지만 고창은 모로비리국으로 확실히 했어.’ 어떻게요? ‘모로는 높다, 비리는 땅과 벌판이라는 고어지. 비리는 부리로 변이되어 백제 고사부리성으로, 그렇게 고부가 됐어.’
|
언제 공부를 그렇게 하셨습니까? ‘고조선이 망하면서 정치조직이 3개로 쪼개졌지. 마한세력은 쌀을 얻을 수 있는 한반도 서남부에 웅거했으나 강력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아 소국으로 나뉘며, 54개국의 이름을 남기게 된 거지.’ 영암은 일난국? ‘글쎄, 한자 전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해. 당시 국(國)이 붙은 정치체제가 영산강의 동과 서로만 나뉘었을 것으로 추정해. 다른 곳과는 묘제가 다른 이유지, 장례법은 잘 변하지 않잖아. 해남과 함평에는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이 주로, 나주와 영암은 옹관묘 그리고 그것을 석실에 넣은 분구에 여러 개가 묻혀있기까지... 동쪽으로 가며 가야 묘제와 혼재되다가 사라져. 구림(鳩林)도 중요해, 옛 정치는 림(林)에서부터 왔으니까, 계림과 구지봉도 숲이거든.’
술만 드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이런 거를 알아야 지역 정체성이 확립돼. 그래야만 정신적 지주가 생겨’ 우리는 좀 부족합니다. 개인, 가정, 조직, 사회, 국가에 대한 신념, 가훈, 사훈, 방침, 지표가 너무 제한적입니다. 지속성도 없습니다. 특히 영암은 바다를 빼곤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서남해 뱃길의 시작과 끝이 상대포와 시종, 포구의 서울이 도포였지요. 곳곳에 터를 잡은 토반 자자일촌도 많고요. 그런데 지금은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 거를 챙겨야 해, 역사가 되는 거지. 자기 성씨의 내력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가문의 자부심을 지역으로 연결해야 해. 신촌리 금동관의 금은 금정, 철은 나주 철천리에서 왔을 거여.’ 별거를 다 아십니다. ‘금정이란 지명이 근대에 생겼다고는 하나, 예부터 금이 나왔다며 그렇게 지었을 거야. 잃어버리고 살았던 우리의 숨결이지. 나주 봉황에도 왕권이 존재했을 텐데, 지금 그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공부를 더 해야겠습니다.
4월의 마지막 월요일 이야기다. 진짜 금동관은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영산강유역 고대문화권 옹관묘에서 1918년 발굴되어, 1997년에 국보가 됐다. 자체 제작인지, 외부에서 받은 것인지는 아직 논란이 많다. 분명한 것은 어느 형식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바로 마한 연맹체를 말한다. 6세기 중엽까지 백제와는 다른 체제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우리의 정체성이다. 시군의 경계를 넘어 바다와 강, 하천을 기반으로 한 남도의 큰 문화자원으로 거듭나게 하면 좋겠다. 고인돌도...
|
- 본 기고는 글쓴이의 허락을 맡아 익명으로 게재하는 글입니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