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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을 저 여리고 어린 시절의 시골 냇가로 물장구치러 가보자. 눈 맑은 피라미 몇 마리와 여린 갈색의 미꾸라지들이 엉겁결에 우리를 피하고, 냇가의 풀숲을 순이와 달음박질하면 청갈색의 참개구리들이 막고무신 콧등에다 오줌을 내갈기고 폴짝 도망치는 곳.
우리의 누렁소가 골이 많은 곳으로 옮겨달라고 동그란 코뚜레를 위쪽으로 치켜세우며 움매 울고, 소 쪽을 향해 달려가던 우리는 스르르 풀 속으로 사라지는 꽃뱀에 소스라치고, 어쩔 수 없이 손목을 내미는 순이 손을 부끄럽게 잡아버린 곳. 그곳엔 항상 우리 순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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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모두 달라도 순수하고 순진한 또래 여자들의 모습은 모두 순이가 아니었던가.
순이가 반쯤 먹고 남은 고구마를 들고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다. 우리는 고구마를 나꿔채 도망간다.
대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어둑어둑한 골목길. 순이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가 가득 담긴 한쪽이 쪼그라진 주전자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와’하고 길섶에 숨어 있다가 순이를 놀래킨다. 순이는 주전자를 그만 내동댕이치고 앙 울어버린다. 다음날 순이의 종아리엔 매자국이 퍼렇다.
순이의 치마는 우리들에 의해 몇 번이고 들쳐지고, 순이의 머리카락은 우리들에 의해 몇 번이고 잡아당겨지고, 순이의 구멍 난 책보자기는 몇 번이고 저 멀리 던져지기 일쑤다.
아침엔 부엌에서 솔가지를 때서 아침을 짓고,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와 김을 매고, 저녁 무렵엔 동네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순이.
순이가 웃는다. 다시 살찐 고구마를 들고.
순이가 웃는다. 어스름 무렵 장에 갔던 엄마가 서편 잔등을 넘어 오신다.
순이가 웃는다. 산간 밭두렁가에 핀 구절초를 머리에 꽂고.
순이가 웃는다. 염병에 한 움큼 머리칼이 바진 얼굴을 들고. 이제 기운이 돌아오자, 배시시.
순이가 웃는다. 검은 뻘밭을 뒤져 캐온 바지락을 머리에이고, 벌 묻은 얼굴이 부끄러워서.
순이가 웃는다. 순이가 웃는다. 나를 쳐다보고.
꽃순이를 아시나요? 가난했던 이유로 서울로 간 나이는 십팔 세. 이름은 순이를?
늦여름 달이 휘영청 밝은 밤. 아랫동네 마을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순이와 나는 동구 밖 이슬이 젖은 뫼 풀밭에서, 말없이 바라보다가 보듬고 넘어졌던 철없던 첫 키스의 추억.
그런 순이가 떠난다. 시내버스 안순이, 구로동에 공순이, 평화시장에 미순이, 영등포에 빵순이, 더러는 꽃순이가 되어.
순이가 꿈꾼다. 피곤함에 지쳐도. 한 평의 벌집에서, 세로로 몸을 세우는 기숙사에서, 남동생의 학비에 눈물이 나는 단칸의 자취방에서. 온 식구의 생활을 책임지는 혹서와 세한의 옥탑방에서.
그래도 싱싱하고 성숙한 여인으로 돌아와 서울 토박이보다 더 간지러운 서울말로 소란 떨며 깔깔대던 순이.
그렇게 떠나고 돌아오기를 몇 해, 자신의 일터에서 만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린 순이. 그리고 우리는 순이를 잊어버렸다.
둔탁한 물방아 내려치는 간격을 따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로 하루를 보냈던 시냇가. 퐁당퐁당 돌을 던지던 작고 낮은 저수지에서 내 저린 바지를 빨아주던 순이. 버리고 버렸으나 기억에 남아 바람벽에 붙여서 다시 씹곤 하던 손때묻은 껌처럼 질기게도 추억되는구나.
우리 마음속의 순이. 옛 장터 신발가게 앞에서 하루 종일 웅크리고 앉았다가 그만 돌아서던 그 성긴 눈빛. 아쉬움의 긴 그림자.
우리 순이.
- 책 <추억의 사립문> 중에서
박석구 시인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2016년 광주 지송시회 8인 시 『연푸른 그늘에 앉아』 공저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