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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제나 힘없는 백성들은 본의 아니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다. 글자를 백성들의 대부분이 몰랐기에 일부 못된 지방의 토호나 양반들의 갑질로 억울함을 가슴에 묻은 채 팔자소관으로 여기며 하늘을 원망하며 살아야 했고, 다산 정약용은 이를 보다못해 그 유명한 시조 ‘애절양’을 남겨 참담한 백성들의 삶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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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는 이러한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한을 호소하는 방법으로 상언 제도를 시행해 백성들을 보살폈다. 상언은 한문을 아는 일부 식자층이나 양반들만이 참여했다. 이에 만천명월의 성군 정조 이산은 즉위한 원년인 1777년 마침내 격쟁추문의 법을 만들어 하층민들의 작은 애로사항까지도 해결할 수 있도록 격쟁을 실시, 큰 성은을 베풀었다.
격쟁에는 사회경제적 비리와 침탈에 대한 호소가 대부분이었다. 격쟁을 하는 백성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이들에 대해 엄금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도 나왔으나, 백성들의 억울함을 씻는 것은 임금이 다친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길이라 여겨 다행히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보다 앞서 태종 때(1401년)에는 한양에 신문고가 설치되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여 해결하는 제도로, 한양 백성은 한성부에 알리고 지방은 고을 원님이나 관찰사에게 억울함을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원통하면 사헌부에 알리고, 그런데도 해결이 안 되면 서울의 의금부에서 신문고를 지키는 담당자에게 신원조회를 받고 고소장을 제출한 후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대부분 백성과 천민보다 사대부나 중인 등 엘리트층들에서 이용 기회가 치중될 수밖에 없었다. 의금부에 설치된 신문고를 직접 치기 위해서 지방 거주자는 서울까지 올라와야 해서 물리적 제약도 많았다.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거나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경우에는 곤장 100대에 징역 3년의 강한 처벌 규정이 있어 신문고를 함부로 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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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으로 억울한 일을 관에 호소하는 소송절차가 경국대전에 마련되어 있었다. 읍→감영→비변사→왕 순으로 단계적 상소 체계가 법적으로 존재했다.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관아에 소장을 내는 것을 등소, 고을을 넘어 감영에 소장을 내는 것을 의송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다른, 악법 ‘부민고소금지법’이 시행되고 있었기에 모반이나 역모를 제외하고는 지역 주민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할 수 없었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엄히 처벌했다. 탐관오리들은 이 법을 믿고 온갖 부정부패를 자행했다.
이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애민군주로 칭송받은 세종 이도가 만들었는데 세종의 생각은 수령은 백성의 부모이고 백성은 수령의 자식인데, 자식으로서 부모를 고소하는 것은 강상죄로 보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상하존비의 명분과 신분질서를 확립하고자 함에 그 목적을 두었던 것 같다. 조선 건국 초기 단계에서 수령의 임기와 통치를 보장함으로써 소신 행정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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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 시대에는 하층민이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기에 하층민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격쟁을 통해 해결을 모색했다. 지방의 토호들과 결탁한 고을이나 감영에서 해결해주지 않으면, 꽹과리를 울리고 북을 치며 왕에게 호소하는 격쟁이 최고의 수단이었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백성이 원통한 사정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성행차’를 통해 격쟁을 활성화시켰다. 상언은 한문으로 당사자가 직접 작성해야 했으므로, 문자에 익숙한 관리나 유생, 중인층이 주로 올렸으나 격쟁은 왕이 행차하는 길에서 꽹과리를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식이어서, 문자에 익숙하지 못한 일반 백성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횟수 제한이 있는 상언과 달리 격쟁은 횟수에 제한이 없다는 점도 격쟁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의 능행 중에만 총 3355건의 격쟁이 있었고 정조는 환궁하여 이에 대한 모든 조처를 취했다. 이 모든 것을 정조는 해결의 지시를 내린 것이다. 백성의 일을 제 일로 여기지 않는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조의 빈번한 ‘화성행차’는 겉으로는 효의 실천 즉,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을 참배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열기 위해서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왕권을 강화한 정조의 노론 벽파에 대한 정치적 시위이자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한 기회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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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을 비롯하여 봉건적 수탈이 극에 달하자, 백성들은 합법적인 소원제도를 포기하고 다양한 형태의 저항을 전개하였다. 농민들의 합법·비합법 투쟁이 집적되면서 1862년 임술농민봉기가 조선 팔도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와언(유언비어)은 살아있는 수령이나 향리들을 호랑이가 물어갔다고 소문을 퍼뜨리거나, 관가에 불이 나서 문서가 불타버려서 환곡을 받을 근거가 없어졌다는 말을 퍼뜨리는 것도 와언 투쟁이었다.
투서, 괘서(삐라를 벽이나 문에 붙이는 것)는 통치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백성들의 투쟁 형태로, 직접 관련된 자들은 대명률에 의해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좀 더 대담한 방법은 산호를 들 수 있다. 산호(山呼)란 관가의 정사가 좋지 못하여 향리나 백성들 가운데 원한을 품은 자들이 산에 올라가 소리치면서 욕질하는 것이다. 밤에 횃불을 치켜들고 시위하며 소리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