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악바우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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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악바우의 생각
  • 입력 : 2021. 07.08(목) 10:56
  • 영암일보
전동호
전) 전라남도 건설교통국장

“12년 만이네.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못 왔지, 속상해서. 워낙 고생을 많이 하셨어. 그런데 이렇게 고향에서 친구들을 보니까 좋네. 다들 잘 되면 좋겠어.” 육남이의 소회다. 팔남매 중 여섯 번째다. 일종, 일남 순으로 막둥이가 종식이다. 작은 동산과 저수지 안으로 월출산이 수묵화가 되는 엄길 출신이다. 같은 하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뒷뫼와 대보둑을 오르내리고 ‘나이살이’와 ‘밀어내기’ 놀이를 했던 추억이 벌써 50여 년이 넘었다.

엄길은 뿌리가 있는 지명이다. 선대의 아호인 길촌(吉村), 길림(吉林)에 존경할 엄(嚴)자를 더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가릴 엄(奄)자로 바뀌었다. 이를 말하듯,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곳이다. 은적산에서 발원한 장천(長川)이 풍요를 이루며, 일찍이 천안을 본관으로 한 자자일촌이 자리했다. 그들이 일군 장동사, 충효문, 수래정, 원경재, 그리고 회화나무와 사장나무가 어우러지며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시악바우는 뒷산 주봉인 철암(쇠암)의 우리식 표현이다. 모임 이름, 책 표지, 그리고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옛적엔 큰 바다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버들래’에서 배에 올라 서호강을 타고 상대포와 시종, 해암포를 지나면 영산강 하구에 다다랐다. 이 뱃길로 백제 왕인박사, 신라 최치원, 고려 유학생과 상인들이 일본과 중국을 오갔다. 이제 그 갯골은 하천이 되고 갯벌은 육해가 된지 오래다.

▲ 철암산에서 내려다 본 엄길마을 전경

옛 영화를 말하듯 고인돌, 글씨바위, 선사주거지 등 고대유적이 많다. 오늘날엔 ‘여기서부터 뒤밖에는 전부 빈집이여.’라는 평진 아제의 현실 지적이 됐다. ‘콩나라’ 한쪽에서 고향의 활기를 되찾겠다며 머리를 싸매고 있다. 외지의 젊은 부부도 들어왔다. 인터넷 매매로 얻은 샘몰아짐 고택을 매 주말마다 재생하는 중이다. 누구든 이웃사촌은 될 수 있다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귀향을 시험하는 두현이도 있다. 봄에 뿌린 텃밭의 씨앗이 상추, 솔과 온갖 약초들로 성장했지만 풀이 절반이다. 마당에는 홀씨가 된 노랑민들레도 많다. 이를 친환경이라 하지만 사실은 적당한 타협이다. 해볼 수가 없다. 언제 뽑았느냐는 식이다. 각종 벌레들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시골생활은 다른 만상과의 동행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내게는 큰집 형이기도 한 그의 꿈을 지원한다.

늘 그랬듯, 윷판이 벌어졌다. 이겨본 기억은 없다. 이 날도 ‘세 모에 순천까지’ 몰아 던지는 업어치기에 또 당했다. 그래도 좋았다. 맘껏 웃고 엉덩이를 흔들며 어깨춤까지 추었다. 영월 영란이는 큰 몸으로, 이례는 소녀처럼, 경옥이는 죽순을 따는 엄마가 되어, 경숙이는 월평을 품고 한달음에 동참했다. ‘워매, 잘 있었어.’가 코맹맹이 마음소리로, 하나 된 포옹이 됐다.

밤으로 가는 시간이다. ‘흡연까페’를 찾아간다. 지금껏 출시된 소주와 소주잔, 디스크, 100년 영사기까지 작은 박물관이다. 중민 선배의 집이다. 자우림의 공연을 틀고 커피, 맥주와 소주, 수박까지…큰 상이 차려졌다. 홍근, 행식, 영동, 동호, 대영, 봉식, 양훈, 형규, 상율, 또 동호까지 다 함께했다. 중식이는 병원 일로, 광식이는 아들 일로, 옥님이는 다른 일로 못 왔다. 산다는 게 늘 내 마음대로는 아니다.

그래도 여유가 있는 친구들이다. 신도비, 복달임, 당산제, 한새바우가 더해진 고향의 정신이다. 해결하고픈 소망도 있다. 저수지 사연, 유물관리, 빈집과 아라리시설, 옛 지명과 기록 찾기 등 많기도 하다. 하지만 삼일 밤낮을 고민하면 해결 못할 일이 없다고들 한다. 무엇이든 딱 부러지는 그들이다. 여러 해 전, 냇갈 둑을 따라 심은 호랑가시나무가 보증하는 사실이다. 다시 새아침이다. 헤어질 시간이다. 아쉬움이다. 그 길에 핀 종혜 집 울타리의 접시꽃이 참 예쁘다.



전동호

영암군 서호면 출신
광양청 개발부장
여수시 산단환경사업단장
여수시 건설교통국장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