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지용과 기생 산홍 이야기

기고
매국노 이지용과 기생 산홍 이야기
심심풀이 우리역사
  • 입력 : 2021. 07.29(목) 10:05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기생은 비단옷을 입고 사대부나 거상들과 사랑을 하거나 고관 대작의 첩이 되기도 했다. 관기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고을 수령이나 벼슬아치들의 수청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고 출산 후에도 일체 책임도 지지 않았다. 사내들의 유혹과 배신으로 상처를 입은 채 아픔 속에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일천즉천법’에 따라 양반과 기생의 사이에 자녀가 태어나면 아들은 노비가 되었고 딸은 기생이 되었다. ‘속신’은 기생이 양반의 소실이 되면 면천되는 것이다. 양반과 벼슬아치들은 기생명부인 ‘기적’에서 명단을 지우고 대신 어린 처녀들이나 젊은 과부들을 보충하며 첩을 삼았고 기생들도 권력과 부를 찾아 첩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러한 ‘속신’을 과감히 거부한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바로 진주기생 ‘산홍’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기록된 산홍과 이지용의 일화다.

한양 최고의 요정 명월관에 매국노 전주 이씨 이지용이 찾아왔다. 이지용은 흥선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에 고종의 종질로 매국의 대가로 은사금 11만원을 받았다. 당시 1만원은 가치는 7억에서 10억을 호가했다.

매국의 대가로 받은 은사금과 매관매직으로 치부해 수백억을 왜놈들이 보급한 화투로 전 재산을 탕진한 망나니였다. 아니 개새끼만도 못한 존재였다. 이완용과 함께 소위 ‘짚고땅’과 계집질로 신세를 망친 왕족이다.

진주 기생 산홍에게도 이지용은 거금을 주며 첩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나라 팔아먹은 대감과는 천금을 줘도 싫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나 주라’고 비웃음 치며 과감히 거절했다. 분이나 몽둥이로 매질했다. 계속해서 찝쩍거리자 산홍은 끝내 자살로 죽음을 선택했다.

기생 산홍
<편집자 주: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11월 22일 2면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앞에 당당함은 일개 기생이 아니라 절대 권력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기개 어린 항일투사로 보는 게 마땅하다’라는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1919년 9월 조선의 치안 책임자로 부임한 지바료는 ‘조선에 기생이 있는 한 치안유지는 어렵다. 그들이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불지르기 때문이다’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손님들에게 독립운동을 독려했던 기생을 사상기생이라 불리며 일경의 요시찰 대상자였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도 이른바 사상기생으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도 안전과 지지기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기생들은 결코 화류계의 여인들이 아닌, 민족정신이 투철한 의기였음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