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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무과를 합격해야 했다. 무과는 고려말부터 시행했으나 본격적인 실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다. 무과는 문과와 같이 3년마다 1번씩 실시하는 식년무과가 최고의 등용문이었다. 식년무과는 초시·복시·전시 3단계의 시험이 있어 초시는 식년 전 해의 가을에 치르고, 복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시행했다.
초시에는 향시가 있었다. 향시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는 도마다 정해진 숫자를 선발했는데 모두 190명을 선발했다. 복시는 식년 봄에 초시 입격자를 서울로 불러 모아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하는 강서와 무예를 시험 보게 하여 28명을 선발했다.
식년무과 외에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증광시, 별시, 알성시, 정시, 관재시 등이 있었다. 식년 이외에 실시된 각종 별시무과에서는 증광시를 제외하고는 대개 지방별로 행하는 초시가 생략되었으며, 그 선발하는 인원도 일정치 않아 대개 식년시의 규정인 28명을 초과해서 선발했다. 또한 임진왜란을 당하자 국가에서는 무관을 확보하고 국민 전투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무과 급제자를 많이 확보했다. 북벌운동의 기운이 드높았던 1676년(숙종 2)의 정시에서는 1만 8,000여 명을 뽑아 이른바 만과(萬科)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급제자의 대부분은 관직에 임용되지도 못한 선달로 생을 마감했다.
무과를 치르기 위해서는 녹명이란 절차를 거쳤다. 시험 일주일 전 녹명소에서 무과시험에 응시할 자들의 신원확인서인 사조단자와 보단자를 제출해 과거응시 부적격자를 가렸다. 사조단자란 응시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것이고 보단자는 내외 친족이 추천하는 일종의 신원보증서이다.
시험장에는 임금이 직접 행차하게 되는데 정병을 필두로 취타대가 입장하고 그 뒤로 홍문대기, 주작기, 백호기, 현무기, 청룡기, 금백색기, 삼각기, 천하태평기 등의 의장기가 입장하고 이어 금월부, 은월부, 금릭과, 은릭과, 청룡당, 주작당 등의 당, 용선, 봉선, 청선 등의 여러 의장물들이 입장하게 된다.
왕은 어가를 타고 내직별감, 상호군, 호군, 재호군 등의 호위무사들과 함께 입장하고 그 뒤로 문무백관 등의 시종관원과 별시위, 내금위 등의 시위군사가 입장하며 그 규모는 약 6200여명이다. 그리고 어좌를 중심으로 시위군사들이 왕의 주변에 위치한다.
무과 전시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치러졌다. 당일 행사는 3엄으로 이루어진다. 엄이란 의식진행시 의식의 단계와 행사참여자들의 준비를 서두르게 하는 북소리로 의식의 엄숙함을 유도하였다.
이 같은 엄격한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조선무관의 표상이 된 분이 바로 조선 숙종 때 수군절도사를 지낸 우리 영암 출신 최원립 장군이다.
본관은 탐진 최씨로 통덕랑 최정과 광산김씨 사이에 1618년 11월 1일에 영암에서 출생해 1691년 5월 74세로 생을 마쳤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 밤길에 큰 호랑이를 만나 호통을 쳐 호랑이가 놀라서 도망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최씨 가문에서는 무과보다는 출셋길이 빠른 문과급제를 바랐으나 아버지 최정이 신궁에 가까운 원립의 뛰어난 활 솜씨를 보고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며 결국 무인의 길을 승낙하자 붓을 던지고 26살인 1644년 식년시 무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입격한 후 수문장과 선전관을 거쳐 거창현감, 운산군수, 순천군수, 봉산군수를 지냈으며 1670년에 어모장군, 절충장군, 우림장군, 여산영장, 수어청 금위대장 등 군의 요직을 거친 후 철원부사와 전라좌수사를 지냈다.
1681년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무예를 꾸준히 연마하여 숙종이 친견하는 무술경연대회에서 노익장으로 1등을 해 하사주를 받고 1684년 평산도호부사에 다시 발탁되었다.
그 후 장군의 반대당인 남인이 집권하는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이 들었고 분통 속에 치료를 거부한 채 “사람이란 다 정해진 분수가 있다”는 유언을 남긴 채 1691년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별세 후에 충간공(忠簡公)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병조참판의 증직과 보사이등공신을 추서했다.
장군은 품성이 호탕해 사내대장부가 국력이 쇠퇴하여 번번히 외적의 침범을 당하고 있는데 안일한 문관이 되기보다는 자신은 무장이 되어 보국하겠다는 큰 포부 속에 군기를 엄히 하면서도 늘 부하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기에 부하들은 충심으로 장군을 따랐고 유사시에는 신명을 바쳐 전투에 임했으며 하루 두 끼만 잡수시며 군량미를 철저히 아꼈고 녹봉을 받아 근검절약해 남은 녹봉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구제할 줄 아는 목민관이었다.
방안에 병풍을 치지 못하게 해 투명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으며 항상 갑옷을 입으신 채 일상생활을 하였으며 주무실 때도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고 대비하는 철저한 원칙주의 군인이었다.
특히 사귐에서도 당색을 가리지 않고 교류하였으며 능력 위주로 부하들을 발탁해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존경받는 지휘관으로 군기를 바르게 정립하였다. 이러했기에 1689년 기사환국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혀 자신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특히 백발백중의 뛰어난 활 솜씨로 인조의 사랑을 받아 옷감을 선물로 받아 부인 양 씨가 무관복을 만들었으며 300여년 후인 2001년 7월,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탐진 최씨 문중 묘가 이장되었을 당시 최 장군 묘에서 시신을 감쌌던 복식류와 염습구, 묘지명, 목관과 같은 유물이 그대로 출토되어 세상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유물들은 그해 8월, 최씨 종중에서 의논 끝에 이화여대박물관 담인복식미술관에 기탁돼 보존처리와 조사가 이뤄졌고, ‘출토복식을 통해 본 17세기 조선 무관의 차림새’라는 보고서까지 마침내 출간되었다.
이화여대박물관에서 개막된 기획전 ‘17세기 조선 무관 최원립묘 출토 복식전시회’를 통해 출토된 곳과 제작 연대, 묘주의 인적 사항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당시 의생활 문화를 엿보기에는 더 없는 좋은 자료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연구가 이어지고 있단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의 악몽과 5·18민주항쟁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반성을 거부하며 거짓으로 일관하는 잔당들의 참담한 작태를 백룡산 자락에 말없이 누워 계신 조선의 올곧은 참 군인 최원립 장군이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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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