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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의 음탕과 사치로 꼽았으나 그 실상은 의자왕의 외교부재로 인한 당나라 10만 대군에게 무너진것이다.
7c의 당나라는 지금의 미국 같은 군사 강대국이었다. 강대국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것이다. 호남평야를 무대로 한 백제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신라를 훨씬 압도했다. 고구려와 왜국까지 연합해 신라를 압박했다. 554년 7월 신라 진흥왕의 배신에 의해 관산성에서 전사해 경주의 궁궐계단에 목을 매달았던 백제 성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과 의자왕의 복수는 당연한 몸부림이었고 신라의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들은 백제의 명장 윤충장군과 계백장군의 백제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642년 신라의 대야성이 백제에게 무너져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자 원한이 사무쳐 김춘추는 눈깔이 뒤집혔다. 고구려와 왜국에 구원의 손길을 폈으나 거절 당하자 당나라 까지 가서 온갖 수단을 부려 사대외교에 성공했고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었고 동과 서의 양방공격을 백제는 막아낼수 없었고 결국 사비성이 당나라 소정방에게 무너졌다는 비보에 계백장군은 좌절했고 결국 황산벌에서 중과부적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과 신라의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백제의 사비성을 신라가 점령한 후 석달동안이나 백제의 기록물을 불태워 기록이 전무하다. 의자왕은 641년 2월에 등극해 660년 8월17일 태자 융과 백성 12807명이 포로가 되어 당나라에 끌려간 뒤 홧병으로 1년만에 낯선 이국땅에서 병사했다.
의자왕은 즉위 초에는 왕권강화에 노력했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대외정책을 펼쳐 신라의 성을 40여개나 정령했으나 자만으로 인한 말년의 무절제한 생활과 성충과 흥수를 멀리하는 등 내부균열을 초래하면서 신라 김춘추 각본의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을 자초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었다. 632년(무왕 33)에 태자가 되었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해동증자'라고 일컫기도 했다.
역사는 승자편에 의해 좌우되었기에 백제 멸망 당시에 의자왕이 술과 여흥에 빠져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아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고 낙화암에서 투신한 삼천궁녀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도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 싸웠다는 기록은 있지만 당시 술과 여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삼천궁녀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655년 8월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여러개의 신라의 성을 빼앗은 뒤에 한때 의자왕은 자만해져서 음란과 향락에 빠졌고 임자와 같은 간신들을 가까이 하며 궁녀들과 어울려 지내며 정사를 등한시하고 늘 술에 취해 있었다.'라는 내용은 있지만 패망할 때까지 매일같이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을 끼고 주색잡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삼천궁녀와 연관되는 대목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 1권 태종춘추공조에서 '궁녀들이 왕포암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타사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 적혀 있으나 낙화암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 고려 후반에 들어서야 낙화암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오고 조선 초의 문신 김흔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 라고 읊은 것이 삼천궁녀를 연상시킨 최초의 기록이지만 삼천 명의 궁녀를 가져다 붙이기에는 너무 부풀렸다.
그 후 민제인의 시 ‘백마강부'에 ’구름처럼 많은 삼천'이란 구절은 있지만 궁녀라는 표현은 없다. 그런데 부여의 부소산 고란사 옆 건물에 이 민제인의 시가 걸려 있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아마도 이 백마강부라는 시가 삼천궁녀라는 포장된 상식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에 편찬된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 단지 ‘여러 비빈’이라는 표현은 있지만 삼천궁녀라는 단어를 수록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처럼 정식 실록이나 역사서가 아닌 단지 한 시인의 시에서 발견된 삼천이라는 단어와 이 시가 걸려있던 장소가 우연히도 고란사 부근이라는 것 때문에 삼천궁녀라는 단어가 생겨나고 그 이야기가 현세까지도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다.
삼천궁녀라는 단어는 1962년에 펴낸 국사대사전에 최초로 공식 수록되어 있는데 그러나 어떤 근거에 의해 그것도 대사전이라는 인정받을 만한 책에 수록이 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설은 없다.
또한 통계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 백제멸망 당시 백제의 가구 수는 76만호(戶)였다고 되어 있다.
통상 1호당 가족수를 적으면 3명, 보통은 4~5명, 많으면 6-7명이라고 가정한다면, 백제 인구는 304만 명에서 380만 명 정도였다고 계산 되는데 당시의 궁녀가 3000명 이었다면 인구 1000명당 1명이 궁녀였다는 계산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당시 백제의 수도 부여의 인구가 5만 여명 정도였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계산을 해보면 더욱 이해가 안 되는 숫자다. 대충 남녀 비율을 반반 정도로 보면 여자가 2만5천여 명인데 그 중 어린아이와 중년 이상을 제외한 절반 정도인 만이삼천 여명 정도를 궁녀의 대상으로 본다면 부여주민의 성인여자 4명중 한명은 궁녀였다는 결론이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으로 궁녀라는 신분이 자기들 집에서 도시락 싸들고 매일 출퇴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많은 인원에 대한 의식주만 해결해주려고 해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것이다.
역사서의 기록으로 볼 때 백제보다 영토가 훨씬 넓고 인구 면에서도 월등히 많았던 조선왕조의 궁녀 수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태종 때인 15세기 초에는 '수십 명', 세종 때인 15세기 초중반에는 '100명 미만', 인조 때인 17세기 초중반에 230명이었다고 되어있다.
그나마 백성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온갖 반발을 무릅쓰고 궁녀의 증원을 감행한 영조때의 궁녀 숫자도 정확히 684명이 고작이었는데 이 기록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도 깨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영조 때 조선의 인구는 1600만~18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인구에서 궁녀 684명을 선발했으므로 인구 2만3000명 ~ 2만6000명당 궁녀 1명을 뽑았다는 것으로 이를 멸망 당시의 백제 인구를 304만 ~ 380만 명으로 추정하여 인구 2만3000 ~ 2만6000명당 궁녀 한 명을 뽑았다고 비례하여 가정한다면 백제의 궁녀는 아무리 많아도 170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며 아마도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실제 궁녀들이 뛰어내렸다는 자리를 답사해 보면 도저히 사람이 강에 투신할 만한 자리가 되지 못해 삼천궁녀설의 허구가 드러나고 있다.
당시 사비성이 함락되고 왕이 포로가 되자 절망감에서 아니면 침략자들의 능욕을 피해 백마강 쪽으로 도망하던 왕녀나 궁녀 몇 명이 왕포암에서 투신하지 않았을까하는 가정은 성립할 수 있으나 삼천궁녀라는 것은 후세인들이 과대포장하여 만들어낸 말이다.
[저자약력]
금정면 출신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