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슬픈 죽음 정선엽 병장 이야기

칼럼
잊혀져가는 슬픈 죽음 정선엽 병장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1. 12.15(수) 16:56
  • 영암일보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12.12쿠테타의 수괴 전두환이 11월 23일 사망했다. 정보정치와 조폭형 정치군인의 전형으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이래 가장 극악무도한 인물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그의 측근 김재규 중정부장에 의해 살해된 뒤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회복의 '서울의 봄'을 기대했다. 당시의 제1야당인 신민당을 유력한 집권당으로 여겼으며 대한민국의 정보를 장악했던 주한 미대사관과 한미연합사령관, 미중앙정보국 한국지부의 상황 판단도 “우리는 한국의 국가 시스템이 자유화돼야 함을 알고 있다. 단 하나의 질문은 속도다. 우리는 한국민의 바람을 수용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바람은 민주화였다. 유신 독재자가 사라졌고, 신민당의 김영삼, 김대중이 지금 조건에서 인기투표를 한다면 신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분석한 1979년 11월 미 국무부 보고서도 있다.

또한 1978년 12월 총선에서 신민당은 무시무시한 관권 동원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32.8%를 득표해 공화당을 이겼다. 민심은 유신독재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2월 12일 갑자기 기무사령관 전두환과 하나회 출신의 그 일당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바꿔 버렸다.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서 “전두환은 유신의 아들”(Chun DooHwan was a Son of Yushin)이라 표현했다. 주한 미 사령관 위컴도 그의 회고록에서 전두환을 “박정희의 프로테제”라고 묘사했다. 전두환은 기무사령관의 직위를 이용해 정보를 장악함으로써 12·12 쿠데타에 성공했다.

괴수 전두환은 ‘지지자를 보상하라’는 그의 원칙에 충실해 능력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지닌 조폭이었다.

간첩을 놓친 하나회 소속 후배 군인이, 간첩을 잡은 비하나회 장교보다 먼저 승진할 정도로 하나회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조직한 군내 사조직이었다. 12·12 쿠데타와 이후 집권의 핵심세력인 하나회 규모는 ‘85명’으로 추산된다. 이 군부세력 85명이 대한민국을 접수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1979년 12.12 쿠테타가 발생한지 벌써 42년이 지난 지금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바로 정선엽 병장이란 역사적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와 국방부장관 노재현조차도 쿠데타군에 항복할 때 정선엽 병장은 원칙에 따라 야간 경계근무를 서다 반란군의 총을 맞고 전사했으니 바로 우리 영암 출신의 장한 군인이다.

정선엽 병장은 영암군 금정면 안로리에서 농부인 아버지 정순남과 어머니 한점순 여사 사이에 태어난 셋째 아들이다. 금정북교를 졸업 후, 광주에 유학해 동신고등학교와 조선대학교 전기공학과 2학년에 재학 중 입대한 키가 훤칠한 헌헌 장부로 책임감이 투철하고 태권도 유단자로 육군본부 헌병으로 근무했다.
정선엽 상병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 야간 근무자였다. 그는 쿠데타군을 마주치자 암구어를 했다. 암구어에 응하지 않자 사격했다.

이때 무장해제를 거부하다 쿠데타군들의 총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근무수칙에 의거 나라를 지키다 반란군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고 그 후 정 병장의 가문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의 부모님들은 생때같은 젊은 자식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홧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의 친형도 광주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잘나가던 금융인으로 승승장구하던 중 아우의 죽음으로 해외 선교사가 되었다.

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 형 훈채씨가 지난 8일 서울 관악구 한 교회에서 모 언론 기자와 만나 전두환의 죽음에 대해 "유가족들에게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죽은 것이 참 추하다"고 비참한 심경을 토로했다.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제23묘역 38315호는 고 정선엽 병장이 안치된 곳이다.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 과정에서 모두 3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중 정 병장과 육군 특수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고 김오랑 중령은 육군본부의 정식 지휘계통 아래 임무를 수행하다 유명을 달리했고, 반란군 측에 동원됐던 고 박윤관 상병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불법 연행 과정에서 숨졌다.

지난 1995년 12월 21일 검찰은 전두환 씨에게 12.12와 관련해 '반란 수괴', '불법퇴진', '지휘관 계엄지역 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 미수', '초병살해' 등 6개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이 중 초병살해 혐의는 국방부 헌병대 소속으로 청사 경계근무 중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정 병장과 관련한 범죄 사실이다.

12월 13일은 정 병장의 마흔 두 번째 기일이다. 전두환이 사망한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기일이기에 의미가 크다. 당시 정 병장은 제대를 불과 3개월 남겨 놓고 있다가 꽃다운 청춘 23살로 참변을 당했다.

정 병장이 참변을 당하던 날 형 훈채씨는 직장이 서울역 앞 대우빌딩으로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데, 삼각지 로터리를 지날 무렵 택시 기사가 "어제 밤 여기서 총격전이 나고 아주 큰 난리가 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국방부 정문에 근무하던 동생 얼굴이 갑자기 떠올라 국방부로 가서 면회신청을 했더니 면회가 안 되었다. 회사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는데, 동생 부대 선임하사라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와 정선엽 상병이 죽어서 국군병원에 안치되어 있다는 비보를 접했다.

1주일 전의 통화에서 "제대하면 유학을 가고 싶다"라며 진로 상담을 했던 동생이었다. 한걸음에 국군 수도통합병원으로 달려간 형은 싸늘하게 식은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했다. 군에서는 동생이 왜 죽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국방부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같은 교회 교우로부터 정 병장 사망경위를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원래 말년 병장은 근무열외를 해도 되는데, 비상령이 발령되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날 밤 중요한 포스트인 청사 뒤편 지하 벙커 초소에 배치되었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청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정 상병은 강직하고 책임감이 강해 공수부대원들이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달려드니 정 상병은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로 걷어차 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정 상병을 향해 반란군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핵심 심장부 국방부를 끝까지 사수하다 비명에 간 것이다.

이후 검찰이 작성한 12.12사태 관련 기록에 의하면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명령을 받은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이 휘하 대대를 동원해 육군본부와 국방부 청사 점령을 시도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육본 청사와 헌병대 막사를 점령하고 잔류 병력들의 무장을 모두 해제시켰다. 국방부 청사 장악에 나섰던 부대는 1공수 5대대 15지역대 병력에 의해 비명에 간 것이다.

쿠데타가 성공한 직후 신군부 측이 작성한 상황일지에 따르면 12월 13일 새벽 2시 10분경 1공수여단 5대대장은 부대대장에게 지하 벙커 점령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15지역대 병력이 벙커를 향해 돌격을 개시했다. 이때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을 체포했지만, 나머지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 중 사살됨"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처럼 반란군에게 대항하다 목숨을 잃은 초병이 바로 정 병장이다. 이날 국방부에서는 쌍방 간 몇 차례 교전이 발생했지만, 목숨을 잃은 이는 정 병장이 유일했다. 전남 영암에서 급보를 듣고 상경한 어머니가 자식의 주검 앞에서 피울음을 토해내고 있을 때, 반란의 주역들은 보안사에 모여 쿠데타 성공을 자축했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욕으로 빚어진 쿠데타 과정에서 희생된 군인들의 죽음도 차별했다.

전두환 일당이 군권을 장악한 1980년 2월 26일 김오랑 소령과 박윤관 상병이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 병장은 이들보다 한 달 가량 늦은 3월 26일에야 안장될 수 있었다. 정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매년 동생의 묘를 찾았지만, 군부 정권 아래서는 마음 놓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총을 순순히 반란군에게 건네줬으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셨던 노모는 지난 2008년 그리워하던 아들 곁으로 떠나셨다 한다.

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의 묘비에는 '순직'으로 되어 있다며 "국방부 장관의 청사 사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다 숨졌으니 '전사'로 바로잡아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형은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17년 4월 정 병장의 모교인 광주 동신고등학교 총동문회는 모교 운동장에 정 병장을 추모하는 나무를 심었다. 조선대학교에서도 고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다만 국가 차원에서의 명예회복 조치는 아직 요원하다. 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맞서 상관을 보호하려다 목숨을 잃은 고 김오랑 소령의 경우 중령 추서와 함께 보국훈장 삼일장이 수여된 바 있다. 형은 더 늦기 전에 동생에 대한 명예 회복도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다.

야권의 일부 정치인들과 일각에서는 전두환이 사망함으로써 그의 죄악도 막을 내렸다고 주장하며 전두환의 행적을 아직까지도 옹호하고 있다. 피해자들에게는 당치도 않은 일이요. 전두환만큼은 역사적 단죄가 계속되어야 한다.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비상계엄확대조치 및 광주학살이라는 일련의 군사반란 및 내란 과정을 거쳐 정권을 잡은 전두환 씨와 뒤이은 노태우 씨는 그들의 집권 13년 동안 그들만의 나라였고 장태완 전 사령관의 지적처럼 “12·12는 육군 중장 3명, 소장 4명, 준장 7명, 대령 11명, 중령 5명, 무장병력 약 6000명이 이끄는 대전복부대가 전복부대로 돌변해 일으킨 약 7시간 동안의 반란이다"라고 정의했다.

전두환이 사망했다고 해서 그가 뿌린 천인공노할 악업의 씨앗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 상처와 악행의 그림자는 도처에서 지금도 진행형이다.

야당 정치인들 일부와 철없는 청년 정치인까지 거짓 궤변으로 광주의 아픈 상처를 덧내고 있으며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는 ‘전두환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궤변을 공공연히 늘어놓고 있다.

광주 5·18은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위권 발동으로 이뤄진 사태라고 주장해 5·18 피해자와 호남인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진실과 정의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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