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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전투경찰 초년병 시절, 임자도 전장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해가 지면 작은 산둥성이에 자리 잡은, 반원형 유리창이 바다 쪽을 넓게 바라보는 초소에서, 흑연 막대기를 양쪽에 고정시키고 서서히 접근시켜 밝은 불빛을 쏟아내는 원통형 서치라이트로 바다를 비추어 경계근무를 맡은 분대였다.
분대장을 포함해 9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분대는 2명을 1조로 두 시간씩 밤새 근무를 마치고, 새벽이면 초승달 모양의 작은 만으로 된 모래사장을 달리며 군가를 부르거나 함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6월의 어떤 날은 군화소리만 저벅거리며 말 한마디 없이 달릴 때도 있었다. 안개가 온 때문이었다.
그곳 안개의 습성은 한마디로 ‘점령’이었다. 밤중 어느 순간, 서해 먼 바다 쪽에서 서서히 바다를 삼키면서 밀려와 서치라이트로 비추는 모든 사물들을 지우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고는, 안개에 반사되는 불빛과 초소에 있는 나와 동료만 외롭도록 철저히 고립시켰다. 초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내무반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보이지 않았다. 급히 문을 닫고 불빛에 흘러가는 안개를 보고 있으면 냉소가 가득한 백화된 악의 무리들이 나를 힐끔힐끔 관음하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진군을 멈추었다.
그날 아침, 우리 대원들은 오랜만에 본 안개 때문이었는지 모래사장을 달리면서 정훈희의 <안개>라는 노래를 발걸음에 맞추어 부르기도 했다. 어떤 이는 그 습하고 하얀 허공에다 애인 이름도 불러댔다. 온 세상을 지우고 있는 새로운 물체에 은밀한 교감을 나누고 내통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해가 뜨면 안개는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해가 뜨고 해가 중천을 지나가고 해가 기울어 저녁이 와도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순찰의 의미를 가지고 내려간 우리에게 반가워하기는커녕 개들만 무섭게 짖어댔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아는가? 며칠씩 풍경이 없는 세상을 산다는 게 얼마나 갑갑하고 지겹고 풍화된 감정으로 치닫는지. 지금쯤 해당화는 얼마나 피었을까. 해당화 꽃잎을 입에 붙이고 어느 새벽, 수줍은 얼굴로 다가와 키스를 하던 그 처녀는 증도에서 염전을 일구는 남자에게 시집간 지가 벌써 1년이 되어가는 구나.
다음날도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안개는 여전하였다. 모든 것이 조용하였다. 늘 저 밑 갯바위를 만지며 철썩이는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새들도 소금기 가득한 해미의 눅눅함에 지쳤는지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경계도 만남도 웃음도 없었다. 내무반 대원들과의 대화는 거의 중단되었고 밤에도 서치라이트를 밝힐 필요가 없었다. 아아, 해가 보고 싶었다. 햇빛이 나의 몸을 일으키는 신처럼 느껴졌다. 달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하는 삶의 한 부분임을 그때야 알았다. 사람들도 보고 싶었다. 낙월도, 어의도, 작도 등의 근처의 섬들도. 모든, 내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들이 새삼스레 그리워졌다.
다음날 아침, 한 대원이 휘파람을 부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안개가 섬처럼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날이 거의 일주일 만에 나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풍경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 안개가 물러가면서 내게 가르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 모든 보이는 것들을 사랑하자. 바람이 불어왔다.
강 안개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곡성에 있는 섬진강 상류로 나는 가끔 낚시를 다니곤 한 적이 있었다. 몇 개의 작은 지류가 모이는 곳이어서 항상 물소리가 가득하였고 거기서 강은 넓어져 물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하여 낚싯대를 던지기에 상당히 좋은 위치였다. 강돌들은 아득한 세월동안 강물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서 모난 것들이 하나도 없고, 갈대와 작은 버들개지, 가는 모래들이 군덴군데 모여 있어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9월의 하순 어느 날,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낚싯대를 폈지만 강 건너 마을 정자 앞 가로등은 이미 켜졌고 그 불빛에 물소리가 나는 쪽은 반사된 물빛을 내게 다시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인 일인지 고기는 그날따라 전혀 물지 않았고 나는 몇 잔의 소주를 들이켜다가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무렵, 약간의 한기에 몸을 추슬러 일어나 보니 벌써 동쪽은 여명의 하늘이었다. 점점 주위가 밝아지자 강 쪽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 피어오르는 안개가 쌓이면서 강물과 함께 서서히 하류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강의 이불이었다. 발 끝에 모여 있는 안개를 휘저어 보았지만 금세 제자리로 되돌아갔고 갈대의 끝자락과 버들개지의 우듬지만 보일 뿐, 안개는 모든 강을 감싸며 그렇게 묵묵히 자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 포근하고 아늑한 어머니 품 같은 모습이여. 강이 왜 늘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맞이하는지를 이제야 알겠노라. 나는 춥지만 모든 옷을 벗어던지고 안개의 강 속으로 서서히 헤엄쳐 들어갔다.
산 안개
고등학교 3학년 끝 무렵, 예비고사를 며칠 앞두고 친구가 머리도 식힐 겸 월출산에 가자고 연락이 왔다. 아마 시험의 중압감과 이성과의 만남에 대한 기피를 자신과 함께 하자는 의미였으리라. 나는 며칠 남지 않는 예비고사에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지만 친구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예전부터 대학을 갈까 은행원 시험을 볼까 고민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월출산 억새밭 언저리에 텐트를 친 시간은 영산강 하구 쪽으로 해가 기울었을 즈음이었다. 텐트를 치고 저녁을 마치자 보름달이 떠올랐고 온 하늘에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달은 점점 떠올라 깨질 듯이 밝아졌고 덕분에 별들은 가벼운 반짝임으로 물러났다. 달빛을 받아들이는 억새들의 새하얀 하늘거림을 보았는가. 햇빛으로 인한 선명한 억새의 모습과는 달리 달빛으로 인해 나타나는 음영이 또렷한 치명적인 또 다른 느낌의 새하얀 은빛 벌판을. 색다른 아름다움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때 도갑사 계곡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의 가슴에 맞닥트린 바람은 차가웠다. 그 바람은 종일 계곡을 감쌌던 해의 여운이 담긴 따뜻한 공기를 안개로 변환시키더니 빠른 속도로 관목과 억새들을 눕히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반대편 동남쪽 강진 성전의 녹차 밭을 거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따뜻하였다. 그리하여 두 바람이 부딪히며 그 중간에 서있는 우리의 앞에서 서서히 안개 벽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대해지면서 몇 십 미터나 치솟더니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당신은 보았는가. 한 발자국을 옮기면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다른 쪽으로 한 발자국 옮기면 하얀 안개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오묘한 세상을.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잘 결정해라. 너의 인생을 위하여 이산이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것 같구나.
다음날 아침, 안개는 산 아래에서 안개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머무는 곳을 가리며 감싸안고 있었다. 우리는 안개 속으로 서둘러 하산하였다. 친구가 말했다. 나, 은행원이 될래. 이 안개처럼 가족을 품고 가는 게 정답일 것 같다.
한참을 내려와 제법 물소리가 나는 계곡 옆 잡초 사이에 안개가 펼쳐진 시야 속에서 구절초 한 송이가 외롭게 피어있었다. 나는 구절초에게 다가갔다. 안개 속에서 떨고 있는 정말 예쁜 구절초를 보며 앞으로 나타날 내 이성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희망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손을 대고는 젖어있는 그 꽃에게 키스를 하였다.
- 책 <사랑의 방명록> 중에서
[약력]
저자 박석구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