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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청구도’로는 만족지 못해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여지승람의 잘못 기록된 부분을 정정하고 보충하기 위해 32권 15책으로 된 대동지지를 집필했다. 전국 각 지방의 연혁. 산수. 인물. 지리를 기록한 책으로서, 조선의 지형과 당시의 각 지방의 풍속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조선 백성은 누구나 "지도 한 장씩 가슴에 품고 안전하게 길을 가야 한다."라는 그의 실학정신을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그의 호 '고산자, '외로운 옛 산 사나이' 가 의미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혼자서 일찍이 조선의 지도 제작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친 조선 후기의 진정한 실학자이며 지리학자에 목판에 능한 출판가다. 1804년에 황해도 토산에서 태어나 1866년에 사망했다고 하나 그가 언제 태어나 어느 때 사망하였는지조차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흥선대원군에게 대동여지도를 바치고 국가기밀누설죄로 몰려 옥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일제가 대원군 이하응을 모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산자가 왕성한 활동을 한 시기는 조선 말 철종조다. 동네 사람이 나무하러 산에 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 걸 목격하고 어려서부터 지도를 그리기로 결심했단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지도의 제작을 위하여 백두산을 8차례 올랐고 조선 팔도를 3번이나 답사하여 세계 그 어떤 지도보다도 실제의 지형. 산. 강. 도로의 모양과 2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정확도가 뛰어나 일본의 지리학자들도 경탄했다고 한다.
김정호는 나라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은 채 '만국 일통론'을 주장한 기학의 전문 가요. 개성 부자였던 친구 최한기와 최성환, 정약용. 김정희의 제자였던 좌찬성 신헌의 도움만으로 어린 딸과 함께 지도를 손수 제작하였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고산자를 도왔던 최한기는 개화파로 연결되고 신헌은 '강화도 수호조약' 체결의 책임관으로 둘 다 실학자들이기에 고산자에게 재정적 후원을 했던 것이다.
22첩의 방대한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전 사전 준비 작업으로 '여도비지', '동여도'와 '청구도'를 만들었기에 그처럼 완벽한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의 차이점은 청구도는 책으로 되어있고 대동여지도는 세로 6.7m에 가로 4.3m 크기의 첩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평생을 가진 것 없이 날품을 팔아 돈이 생기면 지도 만드는 일에만 몰두한 그의 삶과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딸 하나 있는 거 시집도 못 보내고 평생을 아비의 지도 제작을 돕다가 죽었단다. 지아비로서의 구실도 변변치 못해 아내의 그 구박도 가히 짐작이 간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국토의 효율적 관리를 일관되게 주장하며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에게 나라에서 벼슬과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병인양요 등 시대적 혼란의 상황으로 다른 나라에 팔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었다고 오해하여 억울한 누명을 씌워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시킨 당시 안목 없는 군왕과 집권자들의 무지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