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용기

기고
유쾌한 용기
  • 입력 : 2022. 03.14(월) 15:36
  • 영암일보
시인 박석구
용기란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어떤 행동의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턱을 괴고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과정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그다지 용기라고 내세울 만한 게 아무리 기억을 휘둘러봐도 없는, 참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산 느낌이 든다.

어린 시절, 그 흔한 참외, 복숭아, 수박 서리를 할 적에도 앞장서 나서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학교에서 주제 발표나 토론 등을 할 때도 맨 처음 나서거나 좌중을 주도하는 발언 등은 못한 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기억나지 않게 한두 마디 던지고 말았던 못난 애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군대 갈 때까지 근 5년이나 서로 죽자 살자 하고 사귀었던 여자가 달 없는 한여름 밤에 학생회관 벤치에서 머리를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댈 때도, 가슴속은 키스의 욕망에 부글부글 끓고 고개만 돌려도 도톰한 입술이 방치되어 열려 있는데도 결국은 못하고 끝내 남 좋은 일 시켰던,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가책성 추억도 있다.

5.18 때도 마찬가지. 그 많은 데모 속에서도 앞장서 팔짱을 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떨거지처럼 뒤에서만 맴돌았고, 그 치열한 도청의 총격전 날, 담벼락에 붙어 노동청까지 갔을 때, 시민 한 명이 도로로 나서다 총에 맞아 붕 떠서 꼬꾸라지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집에만 처박혔던 못난 자책성 기억도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용기 없는 인간의 표본으로 산 것 같다. 프랑스 혁명 시절 국방상이던 당통(Donton)이 말하기를 성공의 비결은 첫째도 용기, 둘째도 용기, 셋째도 용기라고 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나는 실패의 전형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쪼잔하고 가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도 돌이켜보면 몇몇 당돌한 행동이 생각난다. 군 생활을 전투경찰로 대체하고 임자도 초소에서 맨 밑 졸병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분대의 세 끼 식사를 내가 담당을 해야 했다. 그런데 워낙 고참 하나가 반찬이나 국이 싱겁다느니, 잘라놓은 김치가 너무 길다든지 짧다든지, 왜 마른반찬이 이렇게 축축하냐느니, 식기들이 더럽고 정리 정돈이 안됐다느니 시시콜콜 간섭하고 쥐어박는 통에, 새벽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할라치면 위에서 신물이 나고 그 강박에 밤새 소화되지 않는 생방귀가 연달아 풀풀거리는 소화불량증에 걸려버렸다. 한 달을 고민 후, 한밤중 초소에서 보초 근무를 서고 있는 고참에게 다가가 맞짱을 붙자고 했다.

서로 때리고 맞고 하는 동안 ‘니가 무슨 주방장이라도 되느냐? 나도 너와 똑같은 인격체다’하며, 그동안 불만스러웠던 것들을 전라도의 제대로 된 욕만 골라 섞어서 퍼부어댔다. 그랬더니 내 말을 다 듣고 난 고참이 갑자기 미안하다며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그때의 그 희열.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나는 그를 잡고 엉엉 울었고 그가 제대할 때까지 가장 친한 선후배로 지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소화불량 증상은 깨끗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나의 용기라고 보기보다는 절실한 삶의 고통에 대한 배수진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무역업과 제조업을 동시에 하고 있는 회사에 다닐 때 일이다. 나는 제조업 쪽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일본으로 케이크 데커레이션 물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순 인건비 따먹기 장사를 하는 회사여서 사람 관리가 상당히 힘들었다. 별 보고 출근해 달 보고 퇴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는데, 상무란 사람이 자신이 자신의 고향인 정읍에다 공장을 세우고는 나에게 그곳의 관리를 맡겼다. 상무는 자신의 아버지를 고문으로 내세웠고 나는 사적인 문제까지 회사에 떠맡기려는 상무의 아버지와 자꾸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이유 때문에 상무의 미움을 받아 진급도 되지 않았고, 나보다 6개월이나 늦게 들어온 사원이 무역업 쪽에서는 부장으로 진급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나는 결국 사퇴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부모님과 아내는 참고 다니면 언젠가 좋은 일이 있을 거라며 눈물 바람으로 말렸으나 나는 상무를 찾아가 ‘회사를 자신의 부속물로 생각하려면 차라리 자신의 회사를 차리라’며 돼먹지 않은 충고를 하고는 사퇴를 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 회사에서 배운 아이템 하나를 가지고, 소규모 공장을 차려 제법 큰 과자 회사에 납품하는 하청업체를 하며 근근이 생활하다 5년 만에 완전히 말아먹고 빚까지 지고는 광주로 내려와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의 직업을 갖기 전 1년 동안 아내가 50KG도 채 되지 않던 몸무게를 10Kg나 축내가며, 자동차 도장 공장에 다니며 번 얼마 되지 않는 가슴 아픈 돈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우리는 자신의 소심함에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자신이 저지른 무모함에 후회하고는 가슴을 칠 때도 있다. 젊음의 용기는 그래도 좋다. 아무리 무모함이 지나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몸과 용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은 소심함이 지나쳐 겁쟁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루사’란 노처녀 태풍의 신경질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에도 수제의 연금 내기가 망설여진다. 교통사고를 관리하는 신(神)이 있다면 젊은 시절 봉고차로 시속 130km로 달리던 나를 보고는 군침을 흘렸을 테지만, 승용차로 잘해야 90km로 달리고 있는 지금의 나를 보면 내 목숨을 겨누던 갈고리를 슬그머니 감추어버렸을 것이다. 잔기침 몇 번에 한 움큼의 감기약을 입속에 퍼부어야 안심이 되고, 아폴로 눈병에 걸릴까봐 하루에도 몇 번씩 비누칠을 듬뿍하여 손을 씻곤 한다.

무엇을 할까? 이렇게 짧은 글이나 써봐? 가끔 골치는 아프지만 돈도 들지 않고 인터넷 카페에 올리면 남들이 슬금슬금 봐주고 이럭저럭 모이면 책도 한 권 내? 아니면 염질이나 배울까? 이제 죽음도 어지간히 보아왔고 조상님들의 뼈도 추려보았으니까. 아무리 교통사고로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조커(Joker)처럼 째지게 웃는 모습을 만들어 하느님께 보내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또래 친구들을 위해 이발 기술을 배운다든지, 묵향의 도(道) 속으로 빠져든다든지, 그림이나 기타, 스포츠 댄스를 배운다든지, 마술도 좋으리. 뭔가 용기를 내야 할 때다. 좀 더 삶다운 삶을 위해, 이번에는 이왕이면 유쾌한 용기를 내어볼 참이다.



[약력]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