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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인 한 종족의 내력과 계통 등을 정리한 책을 보첩 또는 족보라 한다.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 공경이라는 유교적 가족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 연원은 중국의 '제왕 연표'라는 황족의 혈통 표기에 근원을 둔다.
개인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 때 과거제도 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 때 응시생들의 가문 내력을 확인하기 위해 첫 출발을 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상단에 적용했던 사조단자와 대략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동성동본의 혈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세보가 등장하기는 조선 중기인 15c 정도로 잡는다. 족보의 효시로는 규장각에 보관되어있는 안동 권씨 '성화보'와 문화 류씨 '가정보'를 꼽을 수 있다. 성화 보는 조선 성종조 7년(1476)에 간행된 족보인데 명나라 헌종의 연호인 성화(成化) 12년에 간행되어 성화 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문화 류 씨의 가정보다. 가정(嘉靖)은 명나라 세종의 연호로 이때 간행되었다 하여 가정 보라 부르는 것이다. 가정 보는 성화보보다 86년 늦은 1562년에야 간행되었다. 가정보가 발간되기 140년 전인 명나라 영락(永樂) 때인 조선 세종 때에 이미 문화 류 씨의 족보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영락 보는 존재치 않고 가정보만 남아 있다. 문화 류 씨의 가정보는 완벽한 체계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외손들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후에 여러 족보를 만드는 데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안동 권씨와 문화 유 씨에 이어서 파평 윤씨가 기해보를 간행하게 되었는데 안동 권씨의 성화보보다 63년 뒤이고, 문화 류 씨의 가정보 보다는 23년이 앞선 조선 중종 34년 1539년이었다.
족보가 일반화되기는 선조 때를 고비로 하여 당쟁이 차츰 가열화되고 문벌 간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면서 각자 자기 일족의 유대를 공고히 해 파벌 간 대립에서 살아남기 위한 보전책으로 발단되었다. 문벌의 단단한 결속을 꾀하는 방편의 하나로 족보가 발달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고려 시대에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 호족 세력이나 건국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토성 분정'이라는 명목으로 충성경쟁과 혼인 정책에 기인해 성씨와 본관을 하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392년 7월 17일 조선 개국 후 성리학이 조선의 지배 사상으로 자리매김 되고 200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으로 나라의 재정 궁핍으로 공명첩 남발에다 상업의 발달로 양민들이 부를 축적해 견고했던 신분 질서가 무너짐에 따라 양반사회 내에서도 계급이 분화되어, 한양에 모여 살면서 관직을 독점하는 '권반'과 향촌 내에서 모여 살며 지방에서라도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 살았던 양반 사족인 '향반', 그리고 권력도 경제력도 없이 도태된 '잔반'으로 재편되었다. 이 세력들 중 특히 잔반들은 암울한 경제 사정을 타파하기 위해 부농층 상인이나 상민들에게 족보를 팔아야 했고 족보를 구입한 상인이나 상민들은 다른 마을로 멀리 이사한 후 가짜 양반 행세를 해나갔다. 또는 돈을 주고 양반 집안에 양자로 입적해 일정 기간 들어가기도 했다. 족보가 이런 방법으로 위조되어 상민들에게 들어갔다.
양반이란 정 1품에서 종 9품의 문관과 무관의 지위를 갖는 자들로 이들만이 족보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그 가족들에게까지 혜택이 넓혀져 가혹한 '군역'을 면제받게 해주는 중요한 면죄부가 족보였다. 조선 후기 양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군역의 대상자가 줄고 나라의 세수가 크게 줄어들게 되자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 이르러선 양반들에게도 군역과 부역을 똑같이 부과했다.
이처럼 족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적서의 구분, 과거시험 응시 자격. 가계의 연원을 밝히는데 활용되는 등 성리학적 신분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귀중한 자료였다. 당시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는 족보만이 양반의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빙자료였다.
조선 건국 초기 양반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3% 정도였다. 그러나 500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는 조선 백성들이 거의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 이면에 얽힌, 조선사회의 변화를 살펴보면, 조선 후기로 가면서 양반사회가 크게 동요되고 분화되기 시작한다. 18c 이후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부를 축적한 부농이나 도고의 거상들이 굶어 죽기 직전에 몰린 잔반들로부터 족보를 마구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는 그의 ‘서당’이란 작품에서 훈장이 된 잔반들을 '설경(舌耕)'이라는 '혀로 밭갈이하는 무리'라 하며 풍자의 그림을 남겨 세태를 비난했다.
여기에다 인쇄술의 발달도 족보가 확산되는데 크게 한몫을 감당했다. 민간 인쇄업자들이 족보를 위조 상해 위로 돈을 번 것이다. 그들은 주로 명문가들의 족보를 위조해 족보 장사를 자행했다.
이외 족보가 없는 평민들은 족보를 사는데 혈안이 되었고 족보를 구입하기 위해 어떠한 고난과 수모도 감수했다. 그 이유는 족보가 있는 양반들은 군역을 면제받았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군역을 부여하려고 하면 족보를 보여 주고 돈을 주고 산 공명첩을 제시해 면제받았던 것이다. 공명첩이 어찌나 많이 남발되었던지 족보가 없이는 통하지 않았다.
족보가 일반화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1909년에 시행된 일제의 '민적법'이다. 지금의 행정기관인 면사무소가 아닌, 경찰기구인 분주소에서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태형과 벌과금을 부과한 강제적 시행으로 노비와 천민들도 모두 성을 갖게 되었다. 이때 노비와 천민의 대부분은 주인의 성씨를 따르며 족보 또한 주인 집안의 것을 쓰기 시작했다.
광해군이 물러난 인조반정 이후에는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서울 등 기호지방에 살면서 권력을 독점하여 일제에 의해 병탄될 때까지 조선왕조를 그들이 이끌었다. 서울 기호지방에 사는 화려한 족벌이라 해서 이들을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 칭했다. '숭용산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굳게 치고 서인 노론 세력 외 다른 정파의 고위직 진출을 철저히 차단했으며 국혼 물실이라 하여 역대 왕비 자리를 반드시 자기 파벌의 서인들의 딸로 채웠다. 척신으로 왕권과 힘겨루기를 해 왕권은 항상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몇몇 특정 소수 씨족 집안인 파평 윤씨, 청송 심씨, 청주 한 씨에 이어. 후기에는 노론 가문들이 왕비를 독점했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장희빈이 사사된 이후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다음은 경화사족의 대척 세력으로 재지 양반(在地兩班)이 있다. 향촌에 머물면서 토지에 기반을 둔 지식 계층을 말한다. 주로 충청. 경상. 호남지방에 거주하며 인조반정 이후 중앙 정계 진출이 막힌 영남 남인 후손들을 대표적인 재지 양반으로 꼽을 수 있다. 정쟁과 사화를 피해 낙향해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았다. 고을 관아에서 30리 정도의 거리에 터를 잡고 고을 수령과 도움을 주고받고 야합하며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양민들을 괴롭혔던 부류다. 이들은 고을에 서원을 세워 현인을 배향하고 강당을 열어 자기 가문의 학동들을 교육하고. 정자를 세워 시회도 열었다. 향안을 만들어 과거 시험 응시생 수를 제한하며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히 했다.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노비의 숫자를 늘려 가문을 보전했다.
그러나 1811년 순조의 공노비 노비제도 폐지와 1823년 노비의 신분 세습 법이 폐지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노비 제도마저 없어졌으나 새경을 받는 머슴으로 존속했다. 1909년에 시행된 민적법은 일제가 을사늑약 후 조선 병합을 목적으로 만든 사회 악법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양반과 평민. 머슴들은 각자 살아남기에 너무 힘들었다. 양반들과 지주들에게 핍박당한 일부 머슴들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그동안의 자기들이 겪었던 한과 분노를 복수로 표출하여 좌. 우익으로 갈라지는 사회의 난맥상을 표출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백성이오. 주권도 백성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주어진 권력을 오직 백성을 위해 펼쳐야 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5형제의 나라 사랑 정신과 노비들을 친족처럼 보살펴준, 참다운 양반 정신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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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준 논설주간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