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깔고 생각에 잠긴 그녀의 뒤편에서 빛이라도 나는 것 같아 어느 결에 나는 합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생각도 반가 사유였다.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녀의 무릎 앞으로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날 사랑해?”
그녀는 예의 미소 띤 얼굴로 눈길은 허공에 둔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긴 시간 아무런 반응도 없다가, 눈까풀을 몇 번이고 깜박인 뒤 내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럴까?”
나는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합궁을 끝내고 그녀와 결혼하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이른 봄,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다. 피스 행성이 그날따라 청명하였다.
나는 꿈틀대는 전복을 만질 때마다 아내의 그곳이 생각나곤 했다. 그럴 때면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며 중얼대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며 ‘전복은 맛있는 것이여’라고 생각을 다른 쪽으로 옮기려 부단히 노력하지만 ‘맛있는 것이여’에 다시 아내의 그곳이 더욱 떠올려지는 것이었다.
전복을 보고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속된 나 자신이 미워, 전복을 먹을 생각이 사라져버려 냉장고 깊숙이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두었다가 썩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은 바로 아내를 침대로 끌어들여 합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스 행성은 그때까지 봄기운이 완연했다.
내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아내는 소파에서 내려와 개구리처럼 사지를 쭉 뻗고 울부짖었다.
“이제 우리 어떻게 살아? 이렇게 우유부단한 당신과 사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야. 내가 잘 죽기 살기로 쫓아다니던 그 남자를 왜 버렸을까? 아이고 내 신세야.”
소름을 돋우는 가벼운 담배. 피가 섞인 소주. 바람이 가득한 안주가 없는 슬픔에 가슴이 베어진다.
죽음의 이슬이 순간 내려와 마음속을 적신다. 나는 주먹을 꼭 쥐고 다짐한다. 다시 살아보자. 그래, 살아보면 죽음보다 나을 거야. 하느님은 지금 나를 버리는 게 아니고 시험하는 중일 거야.
“여보,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 볼게. 한 번만 믿어봐. 알았지?”아내는 금방 소파에 앉아 미소를 띤다. 반가의 자세로 돌아가 되뇐다.
“당신을 믿을게.”
피곤한 여자. 슬며시 내려보며 팔짱을 낀 여자. 결국 두려운 여자. 피스 행성은 순간 궤도를 이탈했다.
이제 나는 아내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막막한 선분을 긋는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단순하면서도 낮은 급여의 일을 닥치는 대로 해나갔다. 밤이면 아내가 날 소파 아래 앉히고 뱉어내는 지저귐만으로 이루어진 대화에 익숙해져 가지만, 늘 지겹고 도망가고 싶다.
이럴 때면 이마에는 잿빛 절망이 번지고 식은땀으로 번진 사타구니는 아내에 대한 무관심으로 전학하고 만다.
“당신은 나에게 너무 무관심해. 무관심이 얼마나 나를 속상하게 하는지 알아?”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을 예측으로 관통하는 아내의 가혹한 말에도 나의 창백한 얼굴은 명랑의 탈을 쓰고 실실 웃고 있다.
“맞아. 그래. 알았어.”
저항과 포기는 시시때때로 번갈아 가며 부추겼지만 나는 결국 포기를 선택하고 만다. 만족한 아내는 어느새 입가의 미소를 오른손으로 훔치며 안방 문을 열고 금방 잠자리에 든다. 청춘은 아득아득 무너지고 있는데, 거울을 보면 아직도 사랑의 흔적이 보이는 내 얼굴에 그만 피식 웃고 만다.
아내는 관대하였다. 그 후 얼룩진 밤 생활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고(가령 거의 매일 늦은 귀가와 취한 채 소파에서 노루잠을 자다가 불쑥 뛰어나오는 생경한 이름 같은 것) 무심한 척 나의 행동에 가벼운 미소만 보탰다. 그러나 그 표정은 한꺼번에 압축되어 있는 것 같은 절망이 묻어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정처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연못 속에서 소통의 미망을 찾아 헤매곤 했다. 정신적 공백 상태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파에 앉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예의 대화 제의가 들어왔을 때 모처럼 웃음을 날리며 나는 아내의 발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당신은…”으로 시작되는 아내의 일반적인 불만과 모든 아픈 과거에 대한 조소와 다른 남편과의 비교가 녹음기처럼 반복되었다.
“미안해.”
“잘 할게.”
“그럴게.”
중간중간 나는 이런 단어로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의 균열은 더욱 심해지고 몇 시간의 충고 같은 잔소리를 마치고 아내가 잠자리로 돌아갔을 때,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복도의 센서 등이 켜지자 아내의 차가운 말이 갑자기 켜지는 불빛처럼 가슴에 꽂혀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긴 복도의 끝을 보여 ‘저 끝이 마지막 길이라면…’하고 자조하였다. 센서 등이 꺼지고 막막한 어둠에 한참을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약간은 몸이 흔들리고, 이내 중심을 잡으면 지나온 삶들이 밀려왔다 지나가면서 소심한 내 생의 방조와 죄책감에 몸서리가 쳐지는 슬픔. 긴 부동에서 나는 결국 캡슐을 타고 행성을 빠져나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캡슐의 모니터가 켜지고 모니터 속의 여자가 내게 다급한 목소리를 던져왔다.
“연료가 떨어져 갑니다. 당신이 갈 행성을 빨리 정하시기 바랍니다.” 모니터에 행성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스마일(smile) 행성, 호프(Hope) 행성, 스프링(spring) 행성, 딜리셔스(Delicious) 행성.
‘희망이 있어야 삶이 좋아지는 것 아닐까? 아니야, 좋든 나쁘든 그래도 가정은 이루고 살아야 해.’
나는 호프 행성과 피스 행성을 두고 한참을 생각하다 결국 버튼 하나를 눌렀다. 캡슐은 주위를 한 바퀴 선회를 하더니 내가 선택한 행성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약력]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