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기고
학교에서
  • 입력 : 2022. 05.18(수) 14:43
  • 영암일보
박석구
시인
이제 아카시아 그늘에다 차를 세울 수가 없구나.

벌써 노랗게 물들어버린 아카이사 잎은 차의 틈새로 날아와서 그걸 꼭 집어내기가 힘들구나.

올려다보면 아카시아가 하늘을 덮는 오솔길 밑, 조소실 마당에는 나부들이 줄지어 갖가지 포즈로 꼼짝 않고 뒤돌아 서 있고, 먼지를 뒤집어 쓴 여학생이 아카시아 낙엽을 맞으면서 아직 설익은 화강암을 정으로 쪼고 있다.

바람이 분다, 차 지붕 위의 수북한 아카시아 잎이 우수수 날려 붉은 벽돌 담장으로 몰려가, 이제는 붉다 못해 선연한 핏빛인 담쟁이 넝쿨 쪽으로 자꾸 쌓여서 시간이 넘쳐난 두 남녀학생의 발길질에 흩어지곤 한다.

늘 나만 보면 손을 흔들어대던 작은 느티나무는 노란색에서 갈색으로 갈색으로 변해 떨어지곤 해 이제 내가 그 밑에 있어도 해를 가릴 수가 없다.

문득 눈이 흐려지고, 가고 있는 그들을 위하여, 이제는 힘없이 날개를 저어가는 저 흰나비를 위하여, 점점 더 세어지는 나의 흰 머리카락을 위하여, 저 뒤늦게 피어있는 민들레 씨앗의 여정을 위하여, 하염없이 가고 있는 가을을 위하여, 어디선가 만나고 있는 무구한 죽음을 위하여, 더 늦은 잎들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살자. 하지만 더 이상 위할 것들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아니, 삼식이가 생각난다.

삼식이는 내 젊은 날, 내가 근무하고 있던 해안초소의 방위였는데 약간 모자라, 그 동네 어른이든 아이든 모두에게 ‘삼식아’로 불리곤 한 청년이었다. 훈련교육 시절 사격장에서 가격 도중 자기에게 총알이 날아와 오른발을 들어 살짝 피했다는 무용담도 웃음 하나 없이 내뱉고, 삼봉산 끄트머리 해변 소머리 바위를 자기가 들어올렸다 내려놨다든가 하는 누구나 아는 맹랑한 거짓말을 곧잘 하였었다.

한번은 밤 근무 때 총탄을 지급했었는데 다른 방위와 농담삼아 쏠래? 쏠까? 하다 진짜로 쏘아 초소 벽을 3군데를 맞고 다시 총알이 문 밖으로 튀어나오는 엄청난 일도 있었다.

꼭 이 오늘 같은 가을날 오후, 바닷가 따라 연이은 삼봉산 억새밭에 그저 심심함을 못 이겨 산책을 나갔다가 억새풀 속에서 울고 있는 삼식이를 보았다. 어깨를 들먹이며 억새풀이 바람에 쏠릴 때마다 같이 흔들리며 울음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그 가슴이 저리는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너무도 푸른 바다, 그 위로 연한 하늘, 하얀 억새들과 기묘한 슬픔을 일구던 삼식이. 자신의 삶이 너무 서러워 울었다며 날 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던 삼식이.

그 다음날, 그는 또 독사를 손으로 잡다가 물려 응급조치 후 목포병원으로 실려 가는 엉뚱한 일을 저질렀다. 독사를 보자 나에게 뱀술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성급함이 앞선 행동이었다.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 삼식이를 위하여.

영상학을 전공하는 ‘온나’라는 학생은 뼈해장국을 항상 즐겨 먹는다. 같이 온 ‘혜령’이라는 음식을 주문하고 나올 시간을 참지 못하고, 500원을 100원짜리로 바꾸어 통처럼 생긴 노래방으로 달려가 김건모의 ‘짱가’를 부른다.

짜장면 집 딸이라는 의상학과 학생은 포켓볼을 칠 때면 내미는 엉덩이가 너무 푸짐해 그 쪽을 쳐다볼 때마다 내 얼굴이 괜히 붉어진다.

잎사귀가 서너 개 달린 빨간 옻나무를 손에 들고 온 미술학과 학생은 ‘아트보드’ 판을 사들고 저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4B 연필로 그걸 그리고 있다. 신기하여 가서보면 어쩌면 그리도 똑같이 잘 그리는지.

체육학과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와 철권 태그매치 오락게임에 정신이 팔려 와와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다.

아아, 이 성급한 젊음이여!

그들이 지나가며 이는 옷깃의 바람에도 싱싱함이 묻어나는구나. 나는 황급히 문을 열고 나와 담배를 피워 문다. 설핏한 가을햇살이 시누대 잎사귀를 건드리자 보르르 인사한다. 올려다보면 저기 게단 위에서 선명하게 흩어지는 여학생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

나의 삶의 터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있지만, 내일 아침은 내려오는 계단 밑이다.

덧붙임 ; 제가 지난 날, 당구대 셋, 상자형 노래방 하나, 오락기 네 대가 곁들여져 있는 조그만 예술대학 매점과 식당을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