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영암의병과 국사봉의 젊은 투혼들

칼럼
한말 영암의병과 국사봉의 젊은 투혼들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7.21(목) 16:30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주간
한말 의병항쟁은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나뉜다. 한말 의병항쟁의 정신적 기저에는 화서학파 화서 이항노와 장성 출신 노사 기정진의 배경지식과 영향력이 컸다.

화서는 과거시험의 부정을 개탄하여 출사치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홀로 궁리하며 성리학을 집중 탐구하고 독자적인 주리론을 체계화하고, '존화양이'(尊華攘夷) '위정척사'(衛正斥邪) 논리를 체득했다. 화서학의 핵심인, '거짓을 배척하고 올바름을 지켜야 한다.'며 '실천적 위정 척사운동'을 정립했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질서를 서양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 선비의 도리이자 덕목으로 여겼다.

화서는 직전 제자가 459명, 문인들은 2,341명에 달했다고 한다. 화서학파는 한말 일제와 비타협으로 맞서며 항일 의병운동을 주도했다. 화서학파 독립유공 서훈자가 233명이고,103명이 순국 했다.

화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한말 위기 상황을 타개할 대응 논리로 '위정척사론'을 주장했다. 1866년 제국주의 침략인 병인양요 전후부터 시작된 국가와 민족문화 수호를 위한 투쟁으로 전국 유림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다.

화서의 학맥을 계승한 선비가 면암 최익현이다. 화서가 총애한 제자로 면암(勉菴)이란 호도 지어주었다. 1868년 면암은 대원군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1876년 일본과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왜양일체론'에 입각해 ‘척화주전’, ‘개항 절대 불가’를 외치며 궁궐 앞에 엎드려 ‘도끼상소’를 올렸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일제의 침략이자 국권 침탈로 인식해 '청토오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 처단을 강력히 주장했다.

1906년에는 투쟁 방식을 행동으로 전환, 무력항쟁에 나섰다.

'포고팔도사민'을 전국 각지에 보내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 궐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호남유생 임병찬과 손잡고, 장성 유생 기우만과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항전에 돌입했다.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유배지 대마도에서 7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그의 운구행렬에는 전국의 유생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때 영암 선비 신준성이 면암의 장례식에 다녀와 덕진의 설락제에서 영암 유생들에게 보고 하는 자리에서 분에 못이겨 쓰러지자 그 자리에 함께한 유생들이 분노해 영암의병을 거의 하게 된 것이다.

영암 의병의 계보는, 면암 최익현(1기)ㅡ정읍 임영찬(2기)ㅡ영암 신준성,이희초,박평남(3기) 등으로 연결된다.

또 한 계보는 장성 고산서원의 노사 기정진 계열을 들 수 있다. 노사 기정진은 외꾸눈의 조선 제일의 성리학자로 진사과 장원을 하고도 벼슬을 마다한 채 독학해 조선 6대 성리학자의 반열에 올라 한양은 물론 전국적으로 그 명성이 높아 수제자 600명에 방계 제자 8.000명을 거느린, '위정척사론'의 첫 상소자로서 '금물양단론'을 주장했으며 이른바 '이일 분수론'을 새롭게 정립해 '행동하는 양심'을 주창한 자타가 공인했던 조선말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조선 조정은 물론이요. 중국에서도 노사의 천재성과 학문의 깊이에 대해서 탄복하고 가르침을 청한 대학자였다.

의병의 계보는 친손자 기우만, 고광순,기산도(1기)ㅡ기삼연,김준,김율(2기)ㅡ심남일,전해산,안규홍(3기)ㅡ강무경,김성재로 이어진다.

의병의 성격도 면암 최익현 계열은, 근왕파 복벽주의에 입각해 왕명에 따라 같은 민족끼리의 전투를 거부했으나 노사 기정진 계열은, 왕명에 따르는 체 하면서도 끝까지 대일 의병 항쟁을 계속 했다. 국사봉의 남일파 '호남의소'의 의병들이 금정면 청룡리 대밭에서 수 백명이 장렬히 전사한 것도 노사 기정진의 학맥과 항쟁 정신을 그대로 표출한 것이다.

국사봉이 의병운동의 본거지가 되기까지에는, 죽봉 김준, 청봉 김율 의병장 휘하의 부장이었던 심남일은 의병장 기삼연이 1908년 2월 2일 체포되어 광주천에서 처형되고 4월25일 김율의 친형 김준 의병장이 어등산에서 전사한 이튿날 4월26일 김율 의병장마저 사살되자 심남일은 강무경과 함께 의연히 일어섰다.

심남일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살아남은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국사봉에 본진을 차렸고 영암의 박평남 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에 무조건 합류했고 나주 남평 출신 의병장 권택도 심남일과 국사봉에서 담판 후 100여 명이 가세해 의병의 숫자는 한때는 600명이 넘어 세를 떨쳐 '호남의소'가 호남의병의 주도적 역할을 했고 왜놈들은 심남일을 수괴라 평가하며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호남의소의 전투력은 막강하여 나주의 전해산 부대를 측면에서 지원하기도 했고 화순의 의병장 안규홍과도 상호 연합작전을 펼쳤으며 1908년 2월 8일 금정면 농소의 용천천에서 심남일,전해산,안규홍 의병장 등 12명의 간부가 회합을 갖고 연합투쟁을 결의하다 일경에게 피습 의병 20여 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후 1908년 8월 24일 보성 문덕전투에서 안규홍부대와 심남일 부대가 연합작전을 펼쳤고 1908년 10월 22일 함평 용진산 전투에서 심남일부대와 전해산 부대가 연합했으며 1909년 2월 보성 웅치전투, 3윌8일 남평거성동 전투, 5월 12일 보성천동 전투에서 심남일, 전해산, 안규홍부대가 연합작전을 전개했다.

심남일 의병장은 '거의일기'에서 일제에 빌붙은 토왜 선유단.자위단.일진회와 일제의 용병인 헌병보조원 조직인 변장대를 원망한 내용의 글들이 많이 등장한다.

영암 의병활동은 접경지 곳곳에 전개되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밤이 되면 왜놈들은 십리도 못가서 의병들에게 살해 될 정도였다.

육지는 물론 해상까지 장악해 그 피해가 극심해 목포 일본인 상인조합에서 의병토벌을 수 차례 본국에 요청, 일제는 '전라도대토벌작전'계획을 수립하여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3기로 나눠 보병 2.260명에 함정 10척을 동원 해안선을 봉쇄 후 일명 '회오리 전법'으로 전라도를 4개로 나눠 분할해 샅샅이 수색하고 민가를 불태우며 전라도 의병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전라도 의병들은 덕룡산 부근으로 모여들어 국사봉, 채일봉, 진터골, 분토, 내산, 반치 등 거점을 이동하며 상호간 연계해 투쟁을 계속했다.

특히 해발 614미터의 국사봉은 사방이 트인 천연요쇄의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여 호남의병의 사령부 구실을 했다.

호남의소는 국사봉의 한 자락인 내산의 차일봉 인근에 본진을 설치하고 부대를 대치, 대항봉, 월임치, 병암치의 4곳에 분산배치하여 부대간 횃불과 깃발 등 신호를 사용하여 상호간 연계 했고 분산배치된 부대도 각자 독자적 의병부대를 인정해 보급투쟁과 노출에 만전을 기했음을 알수 있고 의병의 조직체계도 작전참모격인 모사장과 전투부대인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에 식사를 담당한 호군장, 보급담당의 군량장, 병기 관리의 기군장을 둔 전통적 군대 체제에 동학군의 군편제를 가미했다.

'호남의소강령'도 정해 배신, 양민약탈, 강간 등 중죄를 범했을 경우는 즉결 처분하여 기강을 확립했으며 호남의소 명의로, 격문과 공문을 발송, 보급투쟁과 모병을 독려했다.

호남의소의 조직은 초기에는 총대장 함평출신 심남일 장군 휘하로 강무경, 임만선, 장인보가 선봉장이 되고 중군장은 박사화 안찬재, 후군장에는 노병우 나상화, 최우평, 김성재 군량장은 이세연, 호군장은 정달주 정관오, 작전참모인 모사장엔 권택을 임명했고 의병의 조직은 수시로 개편되었으나 중추적 활동은 영암출신들이 하였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의 영암군 의병 참가자는 의병장급 17명에 의병은 총 187명이다. 특수한 지리적 영향으로 금정면 출신 의병이 호남의소의 핵심간부 의병장급 7명을 포함해 최초의 부부의병 양방매 등 48명으로 26퍼센트를 차지했다.

일제강점기 의병들이 폭도로 몰려 그 가족과 후손들은 고초가 심해지자 자기 조상과 친척들의 의병활동을 쉬쉬하고 가명을 사용해 숨겨진 의병까지 밝혀진다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의병장급 7명에 의병수가 48명은 우리나라 면 단위로는 가장 많은 의병들이 참여해 기록을 세운 자랑스러운 의향이 바로 우리 영암 금정이다. 또한 그당시 호남의소의 군기가 엄격해 양민들이 피해가 없자 주민들은 의병들의 안전과 자금조달, 보급에도 협조했다. 천연적 요새인 자연환경과 후한 민심이 본보기를 보여 국사봉 일대에 루트가 형성되었다.

1908년 한해의 의병활동만 해도 강진오치 전투, 유치 관동 전투,봉황 장담원 전투, 능주노구두 전투, 금정사촌 전투(영산포 헌병대장 금평산 사살), 금정이암 전투(영암 수비대장 남본 대위 사살), 덕진 영보 내동전투,금정 반치 전투, 장흥 신풍전투, 능주 돌정 전투 등 이십여차례 전투가 금정면 일원이나 접경지에서 행해졌다. 화승총이나 죽창의 열악한 무기를 소지 하고서도 기관총 등 현대식 영국제 무기를 소지한 왜군 정규부대와 경찰을 상대 해 왜놈장교 2명과 왜병과 프락치 백 여명을 사살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고 군 단위에서 유일하게일제가 겁을 먹고 영암에 중대단위의 헌병과 경찰 병력을 배치 하고 체포에 혈안이 되어 토벌작전 3기에는 야만적이고 무차별적인 토벌로 금정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으나 의병들은 금정에서 자체적으로 군사훈련, 무기 제작이 이뤼졌고 청춘의 나이에 초개같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

1909년 7월 장성동치 전투에서 일경에 대패하여 큰 위기가 도래했다. 더군다나 일제의 사주로 순종의 '의병 해산령'에 따라 할 수 없이 1909년 7월 21일 금정면 중산의 '고인동'에서 피눈물을 뿌리며 의병을 해산하기 까지 금정면 일대는 곳곳마다 격전을 치뤘던 대한민국 의병사에 유래 없는 의병운동의 최대 본거지였고 의병역사의 현장터다.

불행히도 1908년 10월 9일 화순 풍치굴에 피신중이던 심남일 장군 부부와 강무경 장군 부부가 생포되어 대구감옥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심남일 의병장은 1910년 7월23일 처형되고 이때 호남의병장 67명도 함께 순국 했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