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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0~32)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씨'로 자주 비유한다. 마가복음 4장 30절 이하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3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 한 알로 비유하고 있다. 마가복음 4장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가 몇 개 등장하는데 한결같이 씨와 관련되어 있다.
좀 실망스럽지 않은가? 하나님의 나라가 한낱 씨에 불과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고 안락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으로부터 지우기 바란다. 성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기를 요구한다. 신앙은 가치의 전환이다. 신앙은 모든 것에 앞서 생명으로의 가치 전환을 요구한다.
왜 하나님의 나라를 씨에 비유했을까? 이유는 단 하나, 생명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설령 지극히 작은 겨자씨라 할지라도 생명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삶의 아름다움, 삶의 행복 역시 생명이 있는 곳에 있다는 말이다.
고대 황실 같은 집이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행복일 수는 없다. 집은 아무리 크고 호화로워도 생명이 아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생명이다. 그 안에 사는 가족이 생명이다.
어느 가정의 이야기다. 이 가정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다. 시어머니가 여느 해와 같이 정성스레 장을 담갔는데 제 맛이 나지 않았다. 이후 시어머니가 장맛을 볼 때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시아버님과 아들, 시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언제 된장찌개가 상에 오르냐고 물었다. 시어머니 마음으로는 당신이 손수 담근 장을 가족들에게 자랑스레 내놓고 싶었는데 난처하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며느리가 어느 날 시장에서 꽤 맛이 있다는 어느 유명 상표의 된장을 사가지고 왔다. 그날 저녁 며느리는 이 된장으로 끓인 찌개를 식탁에 올려 놓으면서 마치 어머니가 담근 된장으로 끓인 척했다. '역시 우리 엄마가 최고야.' . 역시 당신 솜씨가 제일이야.' 하며 식구들은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시어머니는 순간 당황했지만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밥 한공기를 비웠다.
이렇게 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비밀이 한 가지 생겼다. 그 일이 있은 후 고부간은 더욱 가까워져, 시장에 갔다 올 때 떡꼬치를 하나씩 사먹으면서 집에 오고, 목욕탕에도 같이 가 서로 등을 밀어 주며 목욕을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잘 못 담근 된장을 아무도 몰래 화단에 묻어 버리며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며느리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머니, 아무래도 콩이 문제였던 것 같아요."
이것이 바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소박한 삶이다. 생명들의 끈적끈적함이 있다. 이런 것을 사는 재미라고 한다. 그래서 살림살이다. 살림살이는 서로를 살리는 일이다. 서로의 생명에 기를 주는 것이다. 고개 숙인 남편 기를 살리고, 없는 살림에 주눅든 아내의 기를 살리고, 입시에 찌든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 이것이 살림살이다. 이 살림살이가 하나님의 나라다. 이 살림살이로 살아가는 가족이 겨자씨 공동체다.
뭔가 갖추고 있어야 행복한 것이 아니다. 갖추기 위해 두 부부가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는 그 과정이 행복이다. 내가 결혼하기 전 나를 아껴 주셨던 교수님이 있다. 그 교수님은 굉장한 부자였다. 200평 가까운 대저택에 사는 분이다. 그런데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산다. 부인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 이미 젊었을 때부터 부인과 아이들은 미국에서 살고 자신만 한국에 나와 있다. 대학 교수에다 부자이니 명예와 부, 그리고 건강을 한꺼번에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하다. 그 가정에 생명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 다행히도 양성이어서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분의 연세 60이 갓 넘었을 때다. 수술 하루 전 내가 면회갔을 때 결혼을 앞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 군, 자네는 없을 때 결혼하게나."
그분은 결혼하기 전부터 너무 부자였다. 부인과 함께 땀 흘리며 이룰 것이 별로 없었다. 큰 집도 마련되어 있었고, 가구도 고급으로 준비되어 있었고, 자식 교육을 위해 따로 재산을 마련할 필요가 없는 큰 부자였다 . 두 부부가 가족과 가정을 위해 해야 될 일이 별로 없었다.
다행히도 그 교수님이 병이 나서 미국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이 병 간호를 위해 오게 되었고, 그 덕분에 지금은 아내와 함께 한 집에서 잘 살고 있다. 결국 그 병이 두 부부 사이를 다시 묶어준 것이다. 생명을 찾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겨자씨 공동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31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며 이 씨는 땅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큰 나무를 이룬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 그것도 한 알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작은 겨자씨에서 큰 나무를 보고, 하나밖에 안 되는 그 하나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다면 하찮은 것이 아니다. 생명이 있다면 그 수(數)도 관계 없다. 생명이 있다면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이라도 상관 없다. 생명에는 꿈이 있고 비전이 있다. 성장이 있고 미래 가 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미국 하버드대학에 가면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은 약 12명의 젊은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이들은 한 나라의 평화를 위해 싸운 이들을 결코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어느 대학을 가 보아도 빛도 없이 쓰러져 간, 셀 수 없이 많은 학도의용군의 비문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물론 그 이름도 없다. 우리는 정권 탈취와 유지에 급급한 잔인한 용의 눈물은 기억해도 겨자씨와 같은 민초의 눈물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불행이다. 언제나 거창하고, 높고, 많고, 호화로운 것을 쫓아간다. 생명이 없는 우상을 쫓아간다. 권력 그 자체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권력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소유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다. 생명을 품지 않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 그 어떤 공간이든 그 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을 품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작은 겨자씨는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을 품는다고 한다. 놀랍다. 씨는 새의 모이다. 그런데 자기를 쪼아 먹는 그새를 품는다고 한다. 이것은 로마라는 거대한 새 앞에 모인 초대 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교회는 교회를 핍박하는 로마를 품었다.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를 쓴 것이 아니다. 그저 품었다.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이건, 국가건, 교회이건, 생명을 품으려 든다면 거기가 하나님의 나라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