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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유계린과 어머니 탐진 최씨 사이에 둘째로 1513년 전라도 해남군에서 출생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한 '표해록'을 쓴 나주 출신 금남 최부의 외손이다. 대제학을 지낸 모재 김안국과 광양 출신으로 호남 3걸 신재 최산두의 문하생이다.젊은 나이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538년 사가독서하였으며, 그 뒤 수찬,정언을 지냈다.
1546년 을사사화 때 해남 출신 소윤파 임백령이 대윤파인 윤임 제거에 동참을 요청하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은 곧은 선비였다. 1547년 경기도 광주 양재역에서 중종비 문정왕후를 비방한,‘여자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벽서가 발견되었다.
미암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나 고향과 가깝다고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유배지가 국경지방이라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미암이 열심히 가르쳐 깨우치게 했다.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석방되었다. 직강,응교,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왕명 출납을 기록하는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장령,집의,사인,대사성,부제학에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575년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여 처가인 담양에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하였고, 역사에도 매우 해박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시에 세자 이호(인종)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선조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강론에 종사하였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미암에게 글을 배워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구결언해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서 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지방의 학풍조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후 종1품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의암서원, 무장의 충현사, 종성의 종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그 유명한 '미암일기'가 있다.
미암의 아내 송덕봉의 자는 성중(成中), 이름은 종개(種介), 호는 덕봉이다. 미암과는 여덟살 차이로 1521년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사헌부 감찰을 지낸 송준의 딸이다. 덕봉은 글쓰는데 자질이 뛰어나고 성품이 차분했다. 문학에 대한 소질은 집안 내림으로 '매창월가'라는 조선전기 대표적 은일가사를 남긴 김종직의 제자 대사헌 이인형이 덕봉의 외조부다. 덕봉이 남편 만나러 가는 길목인 마천령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그 유명한 '마천령상음'이다.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는 평평한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있구나 부인의 몸으로 만리 길 어이 왔는가 삼종의 도는 무겁고 이 한 몸 은 가벼운 것을'
1560년 덕봉은 귀양살이 배소에 있는 남편 미암이 너무 그리워 길을 나섰다.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있는데 그곳에 가는 것이다. 남편없이 홀로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땅끝 해남에서 출발하여 삼천리밖 머나먼 여정을 나섰다. 오랜 유배의 세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장장 삼천리 길을 주저하지 않고 나선 것이다. 맑은 날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험난한 마천령 고개를 넘어야 했다. 덕봉은 그 때 먼 길에 찬바람 쐬고 병을 얻어 훗날 오랫동안 고생했다 한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1570년(선조3년) 미암은 유배에서 풀려 드디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미암은 홍문관에 근무하면서 덕봉에게 편지를 보내, 그동안 일체 여색과 음악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면서 "당신은 이런 훌륭한 남편의 은혜를 입은 줄 알라"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남편 미암의 편지에 대한 아내 덕봉의 답신은 참으로 놀라운 의외의 답신이였다.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당신은 금욕적 삶을 강조하지만,내가 홀로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삼천리 길을 걸어 당신을 찾아간 것과 비교하면 무엇이 더 무거운 줄 아느냐"고 강하게 따져 물었다. 미암은 한켠 사랑스러우면서도 당찬 덕봉의 일면에 황당 했으나 미암은 아내 덕봉의 지적이 맞는 말씀이라고 화답했다.
과히 미암은 그릇이 큰 전라도 사대부였다.
덕봉이 살았던 조선 중기는 과도기로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처가살이를 하는 풍습이 일반적이었고, 딸이 부모를 모시고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며 조상의 제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모계질서와 새롭게 가부장적 사회로 변화해 가는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덕봉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공감하고 가정을 슬기롭게 이끌어 나갈줄 아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편 미암이 유배가 있는 동안 홀로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고, 시어머니 사후에 혼자 상을 치르고, 남편의 유배지까지 삼천리 길을 다녀온 것 하며, 유배를 떠날 때 딸려 보냈던 젊은 첩이 함경도에서 낳은 네 명의 딸을 친딸로 품어 키우고 시집보내는 일까지, 넓은 아량과 높은 부덕을 세상에 보여준 그야말로 통이 큰 멋진 종2품 현부인이였다.
또한 덕봉은 친정 아버지의 묘에 석물을 세울때도 당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편 미암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비석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정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덕봉은 석물은 마련했으나 나머지 경비가 부족하여 애를 태워 금전적 도움을 남편에게 요청했고, 청렴한 미암은 구설에 휩싸일것을 우려해 송씨 형제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과감하게 외면했다. 덕봉은 편지를 통해 이런 미암의 태도를 논리정연하고 젊잔케 비판했다.
미암이 장가오던 날 친정아버지가 '금슬백년(琴瑟百年)'이란 시구를 보고 어진 사위를 보았다고 좋아하던 일, 둘째, 내 형제는 과부가 된 사람도 있고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어 그 비용을 거둘 수 없다는 점, 셋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있는 힘을 다해 장사 지내고 제사를 모셔 며느리로서 부끄러운 점이 없이 행했다고 날카롭게 질타했다.
특히 미암은 장인이 돌아가셨을 때 삼년 안에 한 번도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자신이 이런 평생의 소원들을 이루지 못한다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심경을 피력했다. 덕봉은 이처럼 여인의 나약한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떳떳한 행동과 논리를 근거로 남편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스스럼없이 요구하는 당당한 사대부집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덕봉은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 조선의 여류 문인들과 달리 그 이름이 드높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대등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학문과 문학을 통해 남편과 소통한 보기드믄 조선의 여성 지식인이었다. 덕봉은 1577년 미암이 숨을 거둔 지 8개월 후 향년 57세로 같은 해에 남편 미암의 뒤를 따라 갔다.
우리는 세상에 머무는 동안 필연적으로 인연을 맻는다. 부모와 자식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억겁의 연이 닿아야 만날 수 있다는 부부의 가약도 맺는다. 남끼리 만나는 부부의 인연은 많은 인내심을 동반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 같은 관계를 부부가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성리학으로 점철된 조선의 가부장적 시대의 굴레 속에서 '어수지친'의 관계를 실천한 부부가 미암 유희촌과 송덕봉이다.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이혼율 9위에, 아시아에서는 1위다. 우리나라 인구를 고려했을 때 하루에 300쌍의 부부가 남남이 된다니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매우 심각하다.
특히 예전에는 엄두도 못 냈던 부부해로의 원칙을 이탈하여 황혼이혼까지 등장해 인륜의 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다. 이런 현상을 지하에 계신, '금슬지우'의 미암과 덕봉은 어찌 지켜보시는지 자못 궁금하다.
[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