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의로운 선비 탁영 김일손 이야기

칼럼
조선의 의로운 선비 탁영 김일손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11.24(목) 12:29
  • 영암일보
김오준

탁영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상북도 청도 운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삼현파로 어머니 용인 이씨의 꿈에 세 용마(龍馬)를 보고 세 아들을 낳아, 아들의 이름을 모두 마(馬)변이 있는 글자로 지었다. 큰 아들이 김준손(金駿孫)이며, 김기손(金驥孫)은 둘째이고, 막내아들이 김일손(金馹孫)이다. 세 형제 모두 대과에 갑과로 급제한 수재들이였다.
아버지 김맹은 세종조에 집현전 교리가 되었다가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귀향했으나 성종때 부름을 받아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맏형 준손은 성종조에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유배지에서 연산군의 학정을 규탄하는 격문을 지었고 중형 기손은 사헌부 감찰과 병조.이조좌랑.창녕현감을 지냈으며, 효자의 귀감으로 알려진 절효공 김극일의 손자들이다.
삼족당 김대유는 김준손의 아들로 탁영의 조카이며 정암 조광조의 친구로 학행으로 현량과에 추천받아 관직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때 화를 입어 해남에 유배 되었다.
1471년(성종 2년) 아버지 김맹이 예문관 봉교로 부임하자 외가 근처 용인으로 이사했다.
탁영은 형제들과 함께 소학.통감.강목.사서를 조부 김극일에게 공부했다. 15세에 단양 우씨(丹陽 禹氏)와 혼인했다.
1480년(성종 11년)에 아버지 의 노환으로 고향 청도로 돌아갔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이맹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7세에 밀양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생이 되었다. 1483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김굉필·정여창··남효온 등과 함께 성리학을 배웠다.1486년(성종 17년)에 사마시 생원과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갑과 2위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정자로 승차했고 춘추관기사를 겸직 하였다.
부인상을 당하고 모친 봉양을 위해 경상도 진주의 교수로
자원했다. 2년 동안 진주에서 머문후 병을 핑계로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489년(성종 20년) 25살에 종중 어르신들의 주선과 권유로 예안 김씨와 재혼을 했다. 이해 9월에 성종에게 치도(治道) 12항을 상소 했다.
1491년(성종21년) 사가독서를 했고, 그 후 이조정랑이 되었다. 그는 주로
청요직인 언관으로 있으면서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 비판하였고, 한치의 굽힘도 망설임도 없었다. 또한 이극돈과 성준 등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해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의 원한을 샀다.
특히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국상중에 기생과 장흥에서 놀아난 전라관찰사 이극돈의 비행을 그대로 사초에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낱낱이 기록했다.
또한 세조의 계유정난에 대한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다. 조의제문은 탁영의 스승 점필재 김종직이 항우가 초 나라 의제를 죽이고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사실은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다.
이때가 524년 전인 1498년 7월로 연산군 4년 무오년이다. 윤필상.류자광 등 세조의 집권을 도운 훈구파 공신들이 임금에게 독대를 청했다. 사관 이사공이 배석을 요구했으나 도승지 신수근이 막았다.
연산군은 젊은 사림들이 사사건건 왕의 일에 간섭한다며 벼르던 차에 류자광 등이 고변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죄를 엮는데 앞장섰다.
의금부 도사가 왕명을 받고 청도로 달려가 모친상을 마치고 풍질로 요양하고 있던 김일손을 체포해 압송했다. 김일손은 사태를 직감하고 “내가 잡혀가는 것이 사초(史草)에서 비롯됐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 라며 뒷일을 부탁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 쓴 사초를 모두 들이도록 명했다. 사초는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둔 실록의 초고로 국법에 임금이 보아서는 안 되는 국정자료다.
김일손에게 사감이 많은 이극돈은 간교한 꾀를 내
“예로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내용이 종묘사직과 관계가 있으면 살펴보지 않을 수 없으니 신 등이 검토가 필요한 곳을 절취해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또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뜻에도 합당합니다.”
연산군이 승낙했다. 김일손의 사초에 자신의 비행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세조 시기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고, 또 정희왕후 상(喪) 때는 장흥의 관기와 술판을 열었다고 사초에 적었다. 이극돈은 이 내용들을 고쳐줄 것을 청했지만 김일손은 들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연산군이 김일손을 국문했다.
“세조 당시 일을 어디에서 듣고 기록했는지 말하라.”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꼭 물으신다면 실록이 아마도 폐하게 될 것입니다.”
“네가 들은 일을 쓸 적에 반드시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을 터이니, 말하라.”
“나라에서 사관직을 둔 것은 사(史)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은 직무에 따라 감히 쓴 것입니다. 이미 본심을 털어놓았으니 청컨대 신은 혼자 죽겠습니다.”
죽음을 불사한 신진사림 김일손과 부패한 훈구세력들의 충돌이 사화로 번진것이다.
지친 연산군은 류자광에게 심문을 넘겼다.
훈구파 류자광은 서자출신으로 훈련원 갑사였으나 상소 한 장으로 세조의 부름을 받은 뒤 뛰어난 언변으로 성장한 간신이다. 병조판서 남이를 역모죄로 제거하고 성종 때는 당대 최고 권력자 한명회를 탄핵하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점필재 김종직은 류자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최치원이 지은 함양 학사루에 시를 지어 걸었는데 점필재가 함양군수에 임명되자 류자광을 간신으로 규정, 시판을 떼버렸다. 또한 점필재의 제자 홍유손은 탁영의 낙향 송별연에서 류자광을 모욕했다. 류자광은 그 치욕을 되갚겠다며 앙심을 품고 있던차에 이극돈이 조의제문 사초를 들고 온 유자광을 찾아 온것이다.
국문이 끝나고 판결문은,
“김종직이 일찍이 화심(禍心)을 품고 무리를 지어 문자를 빙자해 선왕을 헐뜯었으니 용서 못할 죄라 대역으로 논해 김종직은 부관참시할 것이며, 김일손을 비롯해 그 글에 가담한 권오복·권경유 등은 같은 죄과라 능지처사할 것이다. 그밖에 뜻이 같은 자, 난언자, 알면서 고하지 않은 자, 나라 일을 비방한 자를 가려 베고 가산몰수 유배하라.”
신진 사림 수십 명이 중형을 받았다. 안동권씨와 광주이씨 문중도 크게 피해를 입었다. 연산군은 승정원에 사건 처리를 일절 누설치 말라고 입단속을 했다.
김일손은 사지가 찢겨나가는 거열형을 당했다. 사초도 모두 불태워졌고 서른 다섯에 생을 마감했다.
우암 송시열은 “선생은 문장과 절행으로 한 시대의 으뜸인데 불행히도 연산군을 만나 화를 입었고 그 화는 온 사림에 미쳤다”며 “지금도 당시 일을 말할 때면 기가 막히고 목이 메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극찬했다.
탁영 선생이 비명에 간 2년 뒤 부인 예안 김씨는 탈상하는 날 큰조카를 불러 양자를 부탁하고 자진했다.
탁영은 붓으로 유교 이념을 지킨 강직한 선비였다. 사관직에 있으면서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고 훈구파들의 비행을 직필해 후세의 거울로 삼으려 했다.
그의 호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뜻이다. 갓끈은 선비를 상징한다. 정론직필로 선비의 절의를 지켰고 피로서 갓끈을 씻었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