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효재(慕孝齋)와 효자 정문손 이야기

칼럼
모효재(慕孝齋)와 효자 정문손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12.08(목) 11:17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193-2번지 신흥마을에는 모효재(慕孝齋)가 있다.
조선 시대 이름난 효자요. 절의 있는 선비의 표상인 정문손(鄭文孫 1473~1554)의 효행과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하동정씨 후손들이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던 묘역에서 1787년(정조 11)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모효 정문손 공을 배향해 추모하는 재실로 종친들의 종회소 겸 강학소다.
원래 이곳 용산리는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나주목과 나주부.전라남도 나주군 원정면 지역이었는데
1906년 월경지(越境地) 정리령이 시행되고 '경계 너머의 땅', 월경지를 부.군.면 통폐합으로 조정하여 대부분 치리소와 더 가까운 고을로 편입하는 바람에 영암군이 된 곳으로 나주시 세지면 성산리와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의 경계가 되는 지역이다.
재실 모효재(慕孝齋)는 정문손의 어버이를 섬기는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그가 초막을 짓고 시묘하던 곳에 향화각을 지어 ‘모효재’라 불렀으며 창건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787년(정조 11), 묘역 내에서 이건하고 1818년(순조 18), 1886년(고종 23), 1916년에 세 차례 중수를 거친 뒤, 1971년에는 번와((翻瓦)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한다.
모효재의 상량기에 '개국 524년 을묘 11월 18일 기축 수주 26일 정유 오시 상량(開國五百二十四年乙卯十一月十八日己丑竪柱二十六日丁酉午時上樑)'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1916년의 중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1964년에는 솟을삼문을 건립하였다. 삼문의 상량기에는 ‘단기 4297년 갑진 3월 초 10일 경자 입주동일 미시 상량(檀紀四千二百九十七年甲辰三月初十日庚子立柱同日未時上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효재 경역은 벽돌 담장으로 둘러져 있고, 솟을삼문의 출입구를 들어서면 모효재가 있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팔작지붕 집이다. 중앙 2칸은 대청이고 좌우 2칸은 재실이다. 뒷면에는 대숲이 감싸고 있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모효재 편액은 해서체로 재실의 본 건물에 걸려 있으며 모효재의 기둥에는 주련(柱聯) 8개가 걸려 있고 편액 옆과 건물 내부에는 민제호와 후손 정순묵이 지은 시문과 모효재 중건기, 모효재 중수기, 모효재 중건로 소서, 서술, 출의기 등 현판 13개가 걸려 있다
배향된 모효공 정문손(鄭文孫1437~1554)은 조선 중기의 대선비로서 자는 광윤이고, 호는 모효재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사헌부 정4품 장령 정희주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담양부 종6품 교수 정의중이고 아버지는 무관으로 종8품 수의부의 정승서다.
부인은 한성부 정7품 참군 신계규의 딸로 평산 신씨로 슬하에 3남을 두었다.
타고난 천성과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매우 총명해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힘써 일찌기 촉망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효행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데 “나주에 사는 생원 정문손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를 섬김에 뜻을 살피어 순종하여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의 나이가 90여 세에 항시 누워 있고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친히 변기(便器)를 처리하고 종을 시키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는 정문손의 나이 70이 넘었으면서도 아침저녁의 상식을 몸소 거행하기를 게으름 없이 하고 쇠약해지고 병들었을 때도 일찍이 자제들에게 시키지 않았고, 여묘살이 3년 동안에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라고 한다. 이 같은 효행이 알려져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모효동이라 불리게 해 호남사림들의 효의 귀감이 되어왔다.
그는 조선조 1507년(중종 2) 정묘년 식년 생원시에 3등 65위로 입격, 생원에 올라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19년 (중종14년) 남곤.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의 모함으로 개혁을 주도해 왕도정치를 펼치려했던,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100여명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 때에는 정문손이 맨 앞장서 임봉.김두.김식 등 10명과 함께 성균관 유생 200여명을 동원하여 연명의 집단상소로 정암 조광조의 신원을 구하였으나 중종이 거부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즉시 귀향해 영산강가에 금사정(錦社亭)을 짓고 선비란 '양심을 보존하고 천성을기르며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글자를 벽위에 새겨놓고 스스로를 수양하며 세상의 위치를 논했으며 이를 실천키 위한 금강계를 조직해 시를 읊으며 후진을 양성하는 선비정신의 본을 보여 주었다.
훗날 조정에서는 모효공의 효행과 선비의 기개를 높이 사 복호를 하사했으며 고봉 기대승도 찬탄의 글을 남겨 추모했다.

금사정에서 남긴 그의 유명한 시 한 편을 소개하여 본다.
'십년에 걸쳐 집 한칸
마련하니

금강위에 달이 뜨니
봉우리 아래 있네

이슬젖은 복사꽃 떨어져
강물위에 붉게 물들어

버들솜 바람에 날려
나룻배안에 가득 채웠네

돌길을 걸어 돌아가는 중은
산 그림자 밖에 있고

물안개 자욱한 백사장에
잠든 백로 빗소리 가에 있으니

만약 왕마힐이 이곳에
노닐게 했더라면

그때 굳이 남산의 망천도를 그리고 읊조리지 않았으리라.'

우리 영암땅 곳곳에는 모효공의 사적들이 무수히 많다. 하동 정씨하면 모효공이 맨 먼저 떠오를 정도다.
신북의 모산리 모산사에 가면 정문손의 효행과 행적이 묘정비석문에 꼼꼼히 새겨져 있으며 금정면 안로리 큰 길가에도 모효공 정문손 효자 정려각이 세워져 오가는 사람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