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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문제가 되고 있다. 남의 나라 역사에 대해 우리가 그토록 열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이것이 단순히 내정 간섭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일본이 자신의 과거 역사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 과거지사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일본의 과거 범죄에 대한 미화는 과거 자체에 대한 미화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있다. 과거를 미화시키는 것은 미래에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다. 과거의 사실을 진술하려는 데에 역사의 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목적은 미래다. 미래에도 과거처럼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국가들을 지배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한 것이라고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의 본질이다.
아시아를 강점하여 지배하는 것이 일본의 역사 서술의 본질임에도 실제의 서술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미화되고 있다. 우리를 통탄하게 만드는 종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모두 그렇다. 본질은 패권인데 실제는 평화와 해방으로 그려지고 있다.
어찌 일본만 그러하겠는가? 일본의 후견인 노릇을 하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도 그러하다. 본질은 석유 생산 장악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실제로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침공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독재자 후세인으로부터 이라크 백성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것이 아닌가? 미국은 승리해서 그렇게 되었나?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거짓 정보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이라크는 침공 이전보다 더한 혼란과 전쟁과 기아 속에 살고 있다.
본질이 침략이요, 지배였기 때문이다. 실제는 거짓 위장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실제의 상황이 본질인 양 호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북핵 문제’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북핵문제가 본직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한반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왜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고 핵사찰을 중지하라는 미국의 말을 듣지 않나 하며 불안해한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직 만들지도 않은 북한의 핵무기가 아니라 이 지구를 몇십 개 파괴하고도 남을 막강한 힘을 가진 미국의 핵 문제가 아닌가?
그 핵을 미국이 가지면 세계가 평화롭고 북한이 가지면 세계가 위험하다는 것인가? 미국은 천사요, 다른 나라는 악마인가? 나는 단언하건데 ‘북핵문제’가 아니라 ‘미핵문제’이다. 북한을 두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 것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핵무기 자체의 우험성을 논하자는 것이다. 본질은 핵무기 자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반도의 비핵화라고 한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한반도의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의 핵에 대한 무방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라. 한반도의 핵무장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질의 왜곡과 실제의 위장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했다. 2,000년 전 팔레스틴의 예수 운동이 그러했다. 예수 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었다. 인간이 지배하는 전쟁과 갈등과 반목, 대립의 세상을 벗어나 평화와 화해, 신롸와 사랑의 운동이었다. 이것이 예수 운동의 본질이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의 모든 국가들은 로마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때의 평화는 ‘PAXROMANA’였다. 로마를 위한 평화였다. 세계는 조용했다. 쥐죽은 듯 조용했다. 찍소리도 못하던 시대이다. 팔레스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 위한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곧 막강한 로마의 군대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독립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 가운데서 그저 막연히 메시아를 그렸다. 로마를 물리치고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그저 막연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 때 갈릴리에서 작은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평화주의자 세계 요한에 이어 갈릴리의 청년 예수라는 사람에 의해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예전과 같은 독립 운동이 아니었다. 칼과 창을 앞세운 무력 운동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칼도 창도 없었다. 그에게 무기가 있다면 그의 가슴 속에 불타오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는 많은 병자를 치유했다. 그는 병자가 이방인인지 로마인인지, 유대인인지를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병자를 돌보았다. 평화를 위한 그의 무기는 평화 그 자체였다. 인간에 대한 뜨거운 연민만이 그의 가슴에 있었다. 이것이 그가 전화 복음이었다.
그는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 본질을 바라보게 했다. 실제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영혼의 눈을 뜨게 했다. 이 세계는 무기로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평화 자체로, 인간에 대한 연민, 그 거룩한 마음, 성령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보게 했다. 거룩한 영안을 뜨는 것, 이것이 복음이었다.
예수님은 배고픈 많은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는 계산하지 않았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 있는 그대로를 내어 놓고 하늘에 감사하며 나누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빈곤과 기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눔이 없었기에 일어난 빈곤의 문제요, 기아의 문재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빼앗아서 배고픔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처럼 무기로 남의 것을 빼앗아서 채워야 된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기를 비웠다. 그 비움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히려 넘침이 있고, 남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죽은 사람을 살렸다. 요한복은 11장 45절 바로 직전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다. 그는 나사소를 사랑으로 살렸다. 율법의 정죄로, 율법에 갇혀 질식한 나사로를 살렸다. 세상이 무력적인 힘으로 갈등과 반목, 대립을 해결하려 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예수님은 사랑으로 생명을 살렸다. 이것이 예수 운동의 본질이다.
그는 이제 죽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한다. 그의 외적인 기적만을 보고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그의 무기가 평화였다는 것을, 그의 무기가 복음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불행히도 대제사장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귀족들은 이 운동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실제 상황인 세력으로만 보았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네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혁명으로 보았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회의를 했다. 요한복음 11장 47절에서 그 회의가 시작된다. 그러나 회의는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요한복음 11장 48절에서 말하고 있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그들은 어느새 예수운동을 로마에 대한 무력적 저항 운동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때 친로마적인 대제사장 가야바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요한복음 11장 49절 이하의 말씀이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믽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무력적인 반로마, 반황제 운동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이 예수만 죽으면 로마가 우리를 건드리지 않고 이스라엘에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그럴듯하다.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는 묘하게 공회를 통해 바리새파 사람들을 설득해 낸다. 당시 그래도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설득해내면 백성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돌려 세울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복음 11장53절에서 말하듯이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죽을 것을 모의하게 된다.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 운동이 어떤 운동인지 그 본질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백성을, 또 실제 상황을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로마총독 빌라도도 이 음모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 대다수의 세력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편에 설득되어 있음을 알고 민란을 염려하며 데제사장의 손을 들어 준다. 재제사장, 바리새파, 로마 총독, 이들은 본질을 호도하고 실제 상황을 오도한다.
역사의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마치 이라크, 이란, 북한이 없어지면 세계 평화가 올 것이라고, 전세계에 비핵화가 이루어 질 것처럼 호도되고 있지는 않은가?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면서 ‘동북아 균형자론’을 말했더니 나라 안팎으로 난리가 아니다. 야당은 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냐고 난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주권국가가 아닌가? 우리는 미국의 종속국가란 말인가? 미국에 아부하여 나라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인가?
우리가 핵무기를 갖고 방어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겐 지금 그럴 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평화란 그 수단도 평화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수단도 목적도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거짓이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전쟁이 실제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예수 운동은 평화 운동이다. 예수 운동은 빼앗고 싸우는 운동이 아니다. 예수 운동은 주고 나누고 비우는 운동이다. 그한 사람을 죽여 인류에 평화가 왔나? 결국 그 하나뿐인 평화의 수호자 예수님을 죽임으로 여전히 세계는 전쟁과 대립의 깊은 수렁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성령강림절 아침이다. 거룩한 마음만이 본질을 냉정하게 보게 한다. 육안으로 드러난 실제에 럭매이지 않는다. 볼 것을 보자. 그리고 다시 십자가를 보자. 아무 힘도 없이 무기력하게 죽어간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해 보자. 나는 오늘 무거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져걍 될 십자가가 있다면 나라를 위해 국민으로서 져야 될 십자가도 있다.
[약력]
현 목포산돌교회 목사
현 전남 NCC 회장
현 목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