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멸망과정과 고종의 망국 행위 이야기

칼럼
조선의 멸망과정과 고종의 망국 행위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12.29(목) 12:37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1910년 8월 29일, 건국 500년 이씨조선이 일제에 의해 패망했다. 패망의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는 분분했다.
망국의 첫발단은, 1623년 광해군 이혼이 서인들의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나 왕의 재목도 아닌, 졸군 인조 이종을 왕위에 올려 국혼물실과 숭용산림의 깃발을 든 서인들의 자가당착과 오직 성리학에만 몰입된 송시열과 무소불위의 그 제자들이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으며 조선의 마지막 희망, 정조 이산이 49세에 갑자기 등창으로 승하하자 12살 순조 이공의 즉위로 수렴청정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죽이 맞은 노론 벽파를 충동해 시파와 남인세력을 축출, 전횡이 시작되었고 정순왕후가 죽자 순조비 순원왕후와 철종비 철인왕후를 배출한 안동김씨 일족들의 60년 세도정치로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탐관오리들의 탐학과 가뭄으로 도처에 민란이 발생하고 도적떼가 출몰해 민심이 흉흉했다.
1863년 철종이 죽자 흥선군 이하응과 신정왕후 조대비의 정략에 의해 고종 이희를 왕위에 올려 그의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10년간 권력을 잡아 안동김씨들을 축출하며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시도하다 무리한 경복궁 중건사업과 서원철폐, 호포제 실시로 기득권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와 면암 최익현의 마부상소로 1873년 퇴출된 후 민비와 끊임없는 권력 투쟁에 여흥 민씨들의 매관매직과 고종의 국제 감각 미숙에 따른 헛발질 외교와 사치 행각으로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정사에 임할 정도로 국정이 파탄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대충 살펴보면 19c 조선왕과 대신들은 급변하는 국제질서에 대응도 못한 채 쇄국 정책을 고수하며 개화를 미루고 거부했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내정개혁과 유럽의 군국주의를 과감히 도입해 군사강국화를 도모하며 정한론을 채탁해 치밀한 각본에 따라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겁박해 강화조규 체결로 첫발을 내딛었고 조선에 중대한 사건이 터질때 마다 무력으로 힘없는 조선을 압박했다.
1882년 임오군란과 제물포조약, 1884년 갑신정변과 한성조약을 입맛대로 체결할 무렵, 1885년 영국의 거문도점령사건이 일어났으나 조선은 파악치 못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실패에다 외세를 끌어들인 청.일전쟁이 청의 패배로 끝나자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챙기고 동북아에서 입지도 강화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과 1895년 을미사변으로 조선의 국모가 비명에 죽고 단발령 시행에 반대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2월 고종은 아관파천의 외통수를 두었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건만 우유부단의 실속없는 국정운영과 자국의 이권을 노린 열강 미.영제국과 일본의 야합으로 망국을 부채질 했다.
1896년 서재필의 귀국으로 독립협회가 등장해 만민공동회를 여는 등 국론을 결집, 근대화를 시도하자 고종은 독립협회를 왕권의 저항세력으로 몰아 보부상을 동원해 해채했고 1902년 러시아의 연해주 차지 와 남진정책에 대항키 위한 1차 영.일동맹 체결,
1905년 5월27일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로 1904년 고문정치 실시를 골자로 한 1차 한일협약체결, 1905년 미국과 일본이 각각 필리핀과 조선을 차지하기로 결정한 카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영국과 일본이 인도와 조선을 차지하는 2차 영.일동맹, 미국이 중재한 러.일 포츠머스 조약,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 강탈과 조선통감부 설치를 결정한 을사늑약의 체결,
이에 항거한 최익현·민종식·신돌석 등이 을사의병을 일으켜 저항과 을사늑약의 파기와 친일파들의 축출을 주장한,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2천만 조선 동포가 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고 쓴 글이 세상에 나왔다.
1907년 이준·이상설·이위종이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세계만국평화 회의에 참석해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항을 주장하다 7월 19일 고종의 강제 퇴위가 이루어졌고 행정권 박탈에다 강압에 의한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8월1일 구식군대가 해산되자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중앙군 시위대와 지방군 진위대가 가담해 정미의병은 전국적으로 거의했고 의병 1만명이 이인영과 허위의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회했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1909년 사법권을 박탈한 기유각서,
경찰권 박탈, 헌병경찰제 도입을 끝으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단행, 조선병탄으로 조선은 막을 내렸다.
문제는 나라야 망하건 말건 이완용.민영휘.이재면 등과 조선국왕 고종의 매국 행위는 극에 달해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입으로는 중립을 외치며 일본에 용산 군사기지 300만평을 제공한 댓가로 30만엔의 거금을 받고 기분이 좋아 이등박문과 일본공사 미에루 등 통감부 말단 관리까지 훈장을 포상했다.
1905년 을사늑약때도 고종은 2만엔을 받았으며 조선의 고관들에게 30만엔을 뿌려 회유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앞두고 또 50만엔을 받았으며 병탄 후 이왕직의 대공 칭호와 함께 매년 750만엔(현 9000억)을 받기로 서명해 돈을 너무 밝혔던 조선국왕 고종의 실체를 일본이 미리 간파해 침략의 시나리오를 앞당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또한, 고종의 친형 이재면과 민비의 친척 민영휘, 고종의 장인 윤택영, 철종의 사위 박영효, 매국노 3관왕 이완용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이 각자 수 백억원이었고을사늑약과 경술국치의 매국행위로 천황으로부터 은사금을 받은자 76명의 당파별 분포는, 송시열계의서인 노론계열이 67명, 남인계열 5명.북인계열 2명이었다. 서인 67명중 이성계의 전주이씨가 무려 13명으로 할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그의 후손들이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조선이 망하자 '탈아론'을 주장했던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개화파 지식인 후키자와 유기치는
"그 나라의 백성을 위해 조선이 망한것을 환영한다."고 조선을 비난했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확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