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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2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유럽 등 세계 언론에 일제이 알려지면서 대한제국 고종황제 이희에게 위험이 닥쳐왔다. 밀사파견의 소식을 접한, 조선 통감부 초대통감 이등박문은 노발대발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7월 3일,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이등박문은 무례한 표정으로 고종 이희에게 “일본제국에 대항하려면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라.”고 헤이그에 밀사를 비밀리에 파견한 사건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언성을 높이며 윽박을 질러댔다. 이에 고종은 밀사를 보낸적이 없다고 크게 잡아 뗐다. 경운궁을 빠져 나온 이등박문은 분을 삭이지 못한채 그의 수족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을 즉각 불러 고종을 폐위시키라고 언성을 높이며 강하게 지시했다.
그날 밤 총리대신 이완용은 고종을 알현하고 ‘황실을 보존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황제의 퇴위가 불가피 하다.'고 진언했다. 고종은 총리대신 이완용의 행동은 신하의 도리가 아님을 꾸짖고 역정을 냈다.
이때가 고종이 이완용을 역신으로 몰아 엄히 처벌하여 황제의 위엄을 세울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3일 후 7월 6일, 어전회의가 열렸다.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은 "스스로 일본 천황에게 가서 사과하든지 아니면 대한문 앞에 주둔해 있는 하세가와 일본 주차군사령관에게 사죄하라."고 2시간 동안이나 주문하며 고종을 마구 핍박했다. 강제로 연금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회의가 2시간이나 진행되는 동안 그 어느 대신 하나 목숨 걸고 고종의 편에 선 대신은 없었다. 모두 다 일제에게 일찌기 돈이나 벼슬자리에 부정부패로 연루 되어 코가 꿰인것이다.
오히려 이완용과 송병준은 이등박문의 지시에 따라 앞을 다투어 고종을 끌어내려 이등박문의 신임을 받으려 경쟁했고 고종 또한 배포있게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고종의 우유부단하고 단호하지 못한 그 이면에는 러.일전쟁때 용산을 일본군 기지로 대여 해 준 댓가와 을사늑약 체결 등 일본 황실로 부터 수 백억의 돈과 뇌물을 받아 미리 챙겼기 때문이다.
7월 7일, 통감 이등박문은 본국 일본 정부에 대한제국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고종 폐위에 관련 처리요강’을 훈시해 달라고 전보를 쳤다.
통감의 전보를 받은 일본 정부는 7월 10일에 원로대신 회의를 소집해 고종의 폐위 문제를 논의했다. 드디어 7월 12일에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받아 통감부에 회신했다.
“문서번호 : 제141호(극비)
발신 : 하야시 외무대신
수신 : 이토통감
제목 : 대한 정책에 대한 각의 결정 통보 건. 사이몬지 총리대신 명에 의함.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제57호 전보 건에 대해서는 원로 제공(諸公) 및 각료와도 신중히 숙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방침을 결정하고 오늘 재가를 받았음.
일본 정부는 현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함. 그 실행에 대해서는 현지의 상황을 참작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를 통감에 일임할 것.
만약 전기(前記) 희망을 완전히 달성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때는, 적어도 내각 대신 이하 중요 관헌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에 따라 집행하고, 동시에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중요 관헌에 임명할 것. 본 건은 극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외무대신이 한국에 가서 직접 통감에게 설명할 것임. 외무 대신은 15일에 출발할 예정임.” 의 전언 통신이었다.
한편 이완용과 송병준은 서로 앞을 다투며 고종의 폐위를 계속 압박했고 일본은 7월 18일에 외상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두 놈들은 하야시가 오기전에 하루빨리 먼저 큰 공을 세워 이번 기회에 더욱 일본에 자신의 입지를 다지겠다고 발광을 해댔다. 장삿꾼 출신의 송병준보다 훨씬 계산이 빠른 이완용은 7월 16일에 재차 입궐해 고종에게 3가지를 강하게 주문 했다.
첫째, 을사조약에 옥새를 찍을 것.
둘째, 황제 폐하가 일본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과할 것.
셋째, 양위할 것을 상주했으나 고종은 거부했다.
17일에도 이완용과 송병준은 고종에게 노골적으로 양위를 하라고 협박하며 요구했다. 고종은 궁리끝에 철종의 사위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했다.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으로 3일만에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과 함께 재빠르게 도망가 10년 동안 일본에 있다가 친일정부가 구성되자 1895년에 귀국해 내부대신을 지내다 또 대역죄인으로 몰려 일본으로 건너 갔다. 1907년 6월에 박영효는 비공식으로 귀국해 부산에 체류하다가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의 주선으로 특별사면을 받았던 친일파였다. 두번이나 역모죄에 연루된, 박영효를 고종은 황제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궁내부 대신세 임명해 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이등박문과 친근한 박영효가 나서서 자기를 보호해줄거라는 얄팍하고 무모한 계산을 한것이다.
7월 18일, 오후 5시에 고종은 이등박문을 불러, 자기는 헤이그 밀사 파견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재차 해명했으나 이등박문은 "특사들이 설사 개인 차원에서 행동했었다 해도 그것은 임금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하게 고종을 압박했다. 고종은 양위와 관련하여 이등박문에게 비책이 있는가하고 비굴한 표정으로 매달렸다. 이등박문은 이 문제는 일본 천황의 신하가 감히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강하게 언급을 회피하며 궁을 나섰다.
7월18일, 오후 8시쯤 일본 외상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해 고종을 알현하고 입국 인사를 했다. 뒤이어 이완용과 송병준도 고종을 알현해 어전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어전회의가 열리자 송병준은 가장 강경한 어조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고종도 이에 강하게 거절하면서 궁내부대신 박영효를 불러오라고 했으나, 박영효는 병을 칭하며 참석치 않았다.
이날 밤 상황은 긴장감속에 험악했다. 고종은 윽박지르는 대신들을 살육하려고 미리서 시위대 근위병들을 궁중으로 불렀고 친일파 대신들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권총을 품에 숨기고 들어갔다.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중과 외부의 연락이 가능한 전화선을 모두 차단했다.
이 날의 상황들을 황현은 매천야록에 자세히 적었으니
“이완용 등은 황태자에게 양위하라고 하였으나, 고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이완용은 칼을 빼어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고함 질렀다.
이때 폐하를 모시고 있는 무감과 액례(掖隷)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이완용의 행위를 보고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칼을 빼어 들고 고종의 말 한마디만 기다리며 이완용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참담한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완용을 흘겨보며 “그렇다면 선위를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자 이완용 등은 그제서야 물러나갔다." 라는 기록했다.
7월 19일, 새벽 5시에 고종은 황태자 이척에게 정사를 대리하도록 명했다.
황태자는 상소를 올려 대리 청정에 대한 명령을 취소할 것을 부왕께 아뢰었다. 고종이 사양하지 말라고 하자, 황태자는 재차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고종은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을 내리고 이등박문의 뜻대로 제대로 힘 한번 못 쓰고 따랐다.
고종의 ‘대리 청정’ 조칙이 내려지자 총리대신 이완용은 기다림없이 곧바로 ‘황제 대리’의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의식을 주관하는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았고 고종과 순종도 의식에 참여를 거부했다.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스스로 궁내부 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7월 20일 오전 9시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즉위식은 고종과 순종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은 궁궐의 내시가 고종과 순종의 대례복을 입고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가 코미디처럼 치러졌다.
고종 이희는 군왕의 수업도 없이 12세에 왕위에 오른 지 44년 만에 민비와 함께 진탕만 치다가 임금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나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 이척에게 양위했다.
1907년 7월 19일의 순종실록에는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라고만 간단히 기록했다.
연출 이등박문에 이완용과 송병준 주연의 단막극이 막을 내린 것이다.
순종이 즉위식을 한창 올리는 그 시각에 이완용의 집이 불탔다. 반일 단체 동우회 회원들이 이완용의 남대문 앞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모두 태워버렸다. 가재도구와 누대에 걸친 조상들의 신주까지 불태웠다.
고종의 퇴위로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어 조선 민중들의 저주를 받았고 마침내 이재명 열사에게 칼침도 맞았다. 그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가족들을 잡아 죽이자’는 군중들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이런 사실도 모른채 이완용은 순종의 즉위식을 주관했고 즉위식이 끝나자 의기양양히 이등박문의 차에 올라타 남산의 조선통감부 관저로 향했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왜성 구락부에 머물다 이완용의 형 이윤용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은 집도 없이 형에게 얹어 사는 이완용이 측은하다고 중구 저동에 있는 남녕위 궁을 이완용에게 하사했다. 그토록 퇴위를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키는 커녕 오히려 집까지 하사한 밸 빠진 고종이었다. 고종과 이완용은 여러가지로 얼켜 설킨 수수께끼속의 능구렁이었다.
한켠, 일제는 천황의 축하 전보를 순종에게 보내 고종의 퇴위를 기정 사실화했고, 7월 20일에 순종 이척도 통감 이등박문과 함께 나란히 각국 외교영사를 중명전에서 접견했다.
양위 받은 고종의 아들 순종도 선왕 고종 보다 더 무능하고 유약해 줏대가 없기는 매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일본은 이번 퇴위사건 때도 을사늑약체결 때 처럼 사전 준비와 계획을 면밀히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를 했었다.
궁녀들과 시위대를 매수하여 고종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통감부에서 보고 받았으며 대한제국군이 보유한 모든 탄약을 미리서 일본군 부대에 강제로 옮겨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대한제국 군대에도 이미 친일파들의 마수가 침투해 일본군들은 기관포를 대한제국군 여단본부 근처에 배치하여 대한제국군의 봉기를 사전에 차단했다.
고종이 양위 되고 일본군은 재빠르게 한반도 전역으로 대대급 병럭을 용산, 개성, 인천, 수원, 대전, 청주, 공주, 광주, 대구, 부산 등에 배치시켰다.
규슈에 주둔하던 일본 정규군 14연대를 대전에 주둔케 했으며 대전사령부를 설치했다
이후 순종 이척은 일제의 각본대로 즉위 후 창덕궁 으로 궁을 옮겼고 고종의 양위사건은 불과 17일 만에 그 막을 내려 망국의 지름길을 여지없이 택한 것이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