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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천리 토동마을은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여흥 민씨 집성촌으로 한 때는 50호가 넘었으나 지금은 20여호만
살고 있다.
군 지정 민속마을이다.
운용재는 1597년 정유재란 이후 여흥민씨 농은 민세승이 조상들의 유훈을 받들어 아천리 토동마을 앞 관송마을에 민씨 문중 서재를 건립하고 조상들의 학덕을 추모하며 민씨 종친자제들과 인근의 학동들을 교육했던 종중의 강학소였다.
운용재에서 공부한 후 서울, 목포, 광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인재들이 많았으나 스승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제 치하에서는 관리가 되어 친일을 하는것 보다는 백면서생으로 농사나 지으면서 지내는것을 더 선호했고 그 영향을 받아서 여흥민씨 후손들과 부근의 유학생들도 관계나 정계보다는 학계로 진출해 훗날 전남대 민준식 총장, 박원기 조선대 도서관장. 임정택 전대학장 등 수 많은 교육자가 이 고장에서 배출 되었고 현재도 교육계와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학자들이 많다.
운용재 재실의 창건 년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고 재실의 본래 위치는 아천리 관송마을에 있었는데 1908년 정미의병 때 이곳 토동마을 출신 민치도 열사 외 의로운 4명의 젊은 민씨 유생들이 모여 의병 참여를 맹약한 결의장소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후 그 사실이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항일투쟁의 모의 장소였다며 일제가 강제로 재실을 폐쇄했다고 한다.
그 후1920년 민씨종중이 종중원들의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로 이거 건립해 2차례나 보수를 했다.
재실의 구조는 팔작기와 지붕의 전면 3칸, 측면 2칸 구조에 토방마루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2개의 서재가 있고 재실건물에 '운용재'(雲龍齋)라는 현판의 판액이 걸려 있다.
비록 출입문도 담장도 없지만 이 운용재야 말로 우리고장 영암의 한말 독립운동과 정미의병사에 한 획을 긋는 민족운동의 매우 귀중한 항일운동의 발상지요. 진원지다.
영암의 한말 의병활동 출발은, 면암 최익현의 제자인 영보유생 신준성이 대마도에서 단식투쟁하다 순국한, 면암 최익현의 장례식에 다녀와 덕진면 운암리 설락제에서 영보 유생들과 영보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문상을 다녀온 그 경과를 보고하다 신준성이 분을 참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자 이를 지켜본, 덕진유생 박평남, 박민홍과 영보유생 신예교, 금정유생 이희초 등이 주동이 되어 거의 해 100여명이 의병에 참여,
나주출신 박사화의 지원하에 금정출신 김은식과 김선중이 중군장을, 군서출신 나도환이 병기감으로 참여해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그후 함평의 심남일 의병장이 전해산 의병장의 부장이었던 김율 부대가 왜경에 패퇴하자
살아 남은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의형제를 맻은 선봉장 강무경 의병장과 함께 국사봉에 본진을 차리자, 영암의 호남창의소 박평남 부대가 심남일 의병장의 부대와 합류했고 이어서 나주 남평출신 의병장 권택도 심남일 의병장과 국사봉에서 담판 후 100여명이 가세 해 의병의 숫자가 600명이 넘는 세를 떨쳐 마침내 '호남의소'가 국사봉에 그 본부를 두게 되었다.
심남일 의병장이 이끌었던 호남의소의 전투력은 막강하여
밤이 되면 왜놈들은 십리도 못가서 의병들에게 살해 될 정도였고 덕림산 자락의 국사봉, 채일봉, 진터골, 분토동, 마봉산성, 반치 등 거점을 수시로 이동하며 합진과 분진으로 부대편제를 변화시키며 예하 부대들과 상호간 연계해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의
영암군 의병 참가자는
의병장급 17명에 의병은 총 187명이다.
우리나라 한말 최초의 여성의병 1호, 부부의병, 오누이 의병까지 3관왕인 금정면 청룡리 분토 출신 양방매 열사가 태어난 고장으로 국사봉 접경지에서 무려 23차례의 전투가 치뤄진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는 1909년 9월 1일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려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했다.
원래는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로 계획되었으나, 작전 개시 초기 단계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10월 30일까지 연장했다.
일제는 육군 보병 연대 2개 및 관할 지역의 육군 헌병 보조원과 경찰을 투입해 다도해인 호남 지방의 지리적 요건을 고려, 도서 지역으로의 의병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해군의 수뢰정 4척을 동원했다.
전라도의 내륙과 연안 도서. 삼분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며 서부 지구는 보병 제1연대가 맡고, 남부 지구는 제2연대가 맡았다.
작전을 3단계로 전개했다. 제1단계 작전은 변산반도 - 남원 - 하동군으로 이어지는 봉쇄선을 설치했고 제2단계는 육군 2개 연대가 광주, 영광 등으로 남하하면서 의병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서부를 맡은 제1연대는 영산강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동부를 맡은 제2연대는 섬진강에서 소백산맥을 통과해 영산강으로 진격했다. 제3단계에서는 해상 루트를 이용해 섬으로 숨으려는 의병을 추적하기 위해 해군 수뢰정 4척을 이용하는 도서 지방 초토화 작전이었다.
의병은 활동 지역 근처의 민간인들의 후원을 필수적으로 하는 게릴라 세력이었으므로, 호남 일대 민간인들에 대한 탄압도 무자비했다. 의병을 후원해주는 것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포위하고, 호적 또는 명부나 민적 등에 기록된 남자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무언가 의심스러운 점이 나타나면 추궁하였으며, 의병을 숨겨주고 식량을 제공했다는 증거가 잡히면 해당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이때문에 호남의 민간인들은 일본군에게 보복당할까봐 의병을 숨겨주거나 지원해주는것을 기피하였고 의병들은 이전처럼 민간인들에게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한 번 수색한 마을을 불시에 다시 수색하면서 일본군의 단속을 피해 숨었다가 안심하고 다시 나타난 의병을 사살하고 체포했다.
일제는 의병들을 폭도로 몰아 무지 막지한 살상이 이뤄졌고 그 가족들과 후손들이 고초가 워낙 심해지자 자기 조상과 친척들의 의병활동을 쉬쉬해 숨겨진 의병들까지 밝혀진다면 참여의병의 숫자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것이다.
특히 영암 금정면은 의병장급 9명에 의병 48명을 배출한 고장으로 면 단위로는 우리나라에서 최다 기록을 세운 자랑스러운 의의 고장이다.
한말 영암 의병운동의 숨은 선구자요.
독립 운동가인 민치도 열사도
이때부터 활동 했다 민치도 열사는 본관이 여흥민씨로 호는 춘산이다. 연촌 최덕지가 창설한 영보 존양루에서 수학해 의정부 종4품 사인을 지낸, 응소 민덕봉의 후손으로, 1868년 금정면 아천리 토동에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일찌기 운용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광주로 유학해 신학문을 공부했고 의협심이 강하여 어지러운 나라의 안위를 크게 걱정했다. 1907년 8월 군대해산과 고종 이희가 순종 이척에게 일제의 강압에 의해 왕위를 양위했다는 비보를 듣고 크게 분통중에 1908년 의병장 심남일이 금정 국사봉에 의병본부를 설치하자 당시 논 10마지기가 넘는, 100냥을 마련해 심남일 의병장에게 아들을 시켜 군자금으로 전달하고 같은 동네에 사는 여흥 민씨 종중 청년인 민자화, 민치선, 민치호, 민치황과 함께 여흥민씨 재실 운용재에서 의병운동 참여를 결의한 후 함께 심남일 의병부대에 참여했다. 일본 경찰은 1910년 경술국치 후 운용재 재실이 독립운동 모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운용재를 폐쇄해 버렸다.
민치도 열사는 의병장 심남일의 휘하에서 뛰어난 지모를 발휘해 군자금을 조달한 특수공작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남한 대토벌 작전 때 포로로 잡혀 일명 폭도도로라 불리웠던, 현재 국도 2호선 목포ㅡ하동간 도로건설 공사에 강제로 끌려가 갖은 고생과 모진 핍박을 당하고 어렵게 풀려나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화순에서 은거하다 1919년 기미 만세사건이 터지자 정재면, 주창업 등과 독립국민당이라는 행동결사대를 조직해 신덕영, 최양옥, 김정련 등 대동단 단원들과 연락해 비밀리에 연계 투쟁을 전개했다.
화순군수와 능주 등 화순군 관내 면장들에게 '천만의 천군이 습래하면 왜노들의 충신은 왜노와 함께 학살할터이니, 생명을 보전하려거든 속히 사죄하라.'는 경고장을 화순 능주우체국에서 발송해 친일 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해 일제와의 내응을 사전에 차단시키고 정인채, 양사형, 양희진, 윤자삼, 민영동 등 전라도 부호들에게 '지금 광주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독립국민당을 조직하고 수 십명의 결사대를 각지방에 파송하였으니 군자금을 제공하여 사형을 면하라.'는 경고와 설득으로 많은 군자금을 모아 백범 김구가 이끌었던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또한 광주 숭일학교 교사 김정련과 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 조달계획을 의논하다가 일본경찰어 감시망에 포착되어 체포 수감된 후 1921년 5월2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일제의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워낙 병색이 짙어 8월 병보석으로 겨우 석방되었으나 이튿날
'내가 죽은 후 대한의 자손들은 국권을 회복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53세의 한창 나이에 자결해 순국했다.
독립이 된 후, 민치도 열사에게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해 장한 열사의 넋을 위로했다.
[약 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 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