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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노론 강경파들의 나친 권력의 탐심에서 비롯 되었다. 노론 세력의 적극적 추대로 왕위에 오른 조선 21대 임금 영조 이금은 자신을 지지한 노론정권을 구축하기 위해 집권을 반대했던 소론들을 탄압했다.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세력이 연계해 전주 이씨 이인좌가 1728년(영조4)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까지 점령했으나 쉽게 진압되고 이를 계기로 소론은 권력으로부터 더욱 더 배제되었으며 영남과 호남은 반역향으로 각인 되었다.
서른 세살의 젊은 유생 이인좌는 영조 4년(1728)3월 15일에, 정권에서 배제되었던 전국의 소론과 남인 일파를 은밀히 규합해. 경종의 죽음에 의혹이 있고 유민이 증가하고 부세저항이 심해져 지배세력의 기반이 동요됨을 간파해.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란군은 청주성을 함락해 창고의 전곡을 민간에 나누어 주며 민의 참여를 유도, 영호남 병의 합세를 도모했으나 3월 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다.
이인좌(1695~1728)는 소론으로 전주이씨이며 충북 괴산출신이다.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후손이다.
난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낙인찍혀 전주 이씨 종친부의 족보 선원록에서 이름이 지워져있고 가문도 제명 되었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9대손으로 조부는 관찰사를 지낸 이응시요. 난에 가담자는 신숙주의 후손인 유생 신천영과 호남지방에서는 박필현, 나만치, 나숭곤, 김단, 정팔용, 평안도 감사 이사성, 함경도 감사 권익관, 부사 황부, 한양의 금군별장 남태징, 병조참판 김중기, 상주유생 김홍수 등이다. 영조는 이인좌 난 이후, 붕당의 폐단을 없애겠다며 탕평책을 추진해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삿된 마음이다’라는 탕평비를 성균관에 세웠으나 그건 한낱 모션이었고 1724년 대과와 중시에서 장원급제 해 영조에게 소신 발언을 한, 소론의 지도자 김일경을 불경죄를 적용 참형시켰고 형조판서 윤취상도 옥사를 시켰다. 대과 급제 후 사헌부 정5품 지평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윤취상의 아들 윤지는 죄도 없이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19년 만에 나주목으로 이배됐다. 이듬해 유배는 풀렸지만 나주를 벗어나지도, 벼슬도 할 수 없는 전리방축(田里放逐)을 당했다.
윤지는 30년 동안의 유배살이와 방축생활을 하면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소론 일파들을 비밀리에 모았다. 민심을 분열키 위해 나주목에 괘서를 붙이고 진도에서 출발해 강화도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역모를 계획했다.
1755년(영조31) 나주 객사 망화루에는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벽서가 붙었고 ‘거병하여 움직이려 하니 백성은 동요하지 말라’란 벽서도 붙였다.
그러나 전라감사 조운규의 기찰에 발각되어 윤지를 비롯해 윤지의 아들 윤광철과 나주목사 이하징 등 60명을 체포해 한양으로 압송했다. 분노한 영조가 친국 후 윤지와 이하징은 즉결 처형시켰고 가족까지도 연좌해 극형을 내렸다. 이미 죽은 윤취상, 김일경, 조태구에게도 형벌이 추가됐고 아녀자들은 노비가 되었다.
나주괘서사건의 이면을 살펴보면, 조선 19대 임금인 영조의 아비인 숙종 이순이 60세인, 1720년에 별세했다. 숙종 말년, 후계자 지정을 놓고 무수리 출신 경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 이금을 지지했던 노론세력과 장희빈의 아들 경종인 세자 이윤을 지지한 소론 세력 사이의 다툼은 절정에 이른다.
환국을 교묘하게 구사하며 편하게 왕위를 지켰던 정치꾼 숙종의 이상한 제스처로 곡절 끝에 세자 경종 이윤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숙종 말기부터 정국을 장악한 노론세력은 어머니 장희빈과 외가가 몰락해 뒷배가 약한 경종을 계속 압박하며 후사가 없다는 핑게로 이복 동생 연잉군 이금을 세제로 삼았다.
나아가 세제 이금에게 대리청정을 주문하며 경종을 계속 괴롭혔다. 오만한 노론의 무리수는 결국 소론의 반발을 불러왔고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주도한 신임옥사를 계기로 노론은 한때 실각했다.
거기에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역모사건이 일어나 노론의 주요 세력이 박살나고 세제였던 연잉군 이금의 이름까지 오르내려 목숨 보전조차 위태로웠다. 그러나 사태파악 능력이 취약하고 심약한 경종의 인정으로 연잉군은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허약했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노론세력의 정치공작에 의한 스트레스로 사망하면서 연잉군 이금이 보위에 올랐다.
21대 왕으로 즉위한 영조는 집권당 노론 강경 세력들의 주장을 받아들에 소론파 김일경과 목호룡을 숙청하자. 소론 강경파들은 경종 독살설과 영조의 혈통을 문제삼으며 물고 늘어졌다.
1740년, 소론의 이광좌가 신지도에서 유배중 사망한 이후 신임옥사가 무고로 다시 처리되어 노론 4대신의 희생자들이 복권되면서 소론세력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를 간파한, 나주에 유배 중인 윤지는 소론 내 불만 세력들을 규합해 나주 목사 이하징까지 끌어들에 거사를 계획한다.
백성들의 민심을 자극키 위해 무당들을 동원해 푸닥거리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나주 객사에 영조를 비방하는 벽서를 붙였다.
벽서사건의 보고를 접한 조정 에서는 '무신년 일당들의 소행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려 주모자 윤지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해 도성으로 압송했다.
윤지를 비롯한 사건의 주모자들은 영조의 친국에 맞서다가 형장의 이슬로 모두 사라졌다. 같은 해 5월에는 심정연을 비롯한 소론 파 세력의 자제들이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와 조정을 비방하는 과거 답안지를 제출해 또 다시 소론세력들이 숙청을 당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은 소론세력의 신치운은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라고 항변하니, 영조는 분노해 신치운의 살점을 도려내는 극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목숨을 건 소론 강경파들의 의리를 내세운 행동의 표출은 소론을 사실상 역당으로 전락시키고 말았고 계속된 소론들의 음모와 역모는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난 영조 말기 조선정국은 사실상 노론이 장악해 망국의 지름기로 치닫게 한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소론세력은 500여명이 참수당했고, 이 가운데 전주이씨 왕족들도 포함되었는데 역모를 주도한 소론에 의한 추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종친이었던 이증, 이관, 이학, 이당이 무고하게 처형당했다. 물증도 없는데 영조의 심한 고문으로 고통을 참지 못하고 거짓 자백해 극형으로 다스렸다.
이 사건 이후 조정은 노론 일색으로 재편되었으며, 박문수 등 소론 온건파 몇 명을 제외하고는 남인과 소론이 거의 사라진 뒤 영조는 '천의소감'을 편찬해 경종의 죽음과 자신은 절대 무관하다는 입장을 널리 밝힌 교지와 서적도 보급한다.
영조 때는 숭례문인 지금의 남대문 앞에서 역적 처형식을 가졌다. 1755년 여름에 치러진 나주 괘서사건의 처형식은 영조의 경종독살설과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던 영조의 광기가 폭발한 사건이었다고 후세의 사가들은 평가했다.
영조 왕위계승과 영조의 출생에 의문을 품은 수많은 소론들의 의문사항을 윤지가 실천에 옮겼다. 재위 4년째인 1728년 영남 남인들과 소론들이 주축이 된 이인좌의 난이 무력으로 정권을 바꾸려는 쿠데타였다면 나주벽서사건은 붓으로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인좌난 후 27년이 지난 사건에다 전라도 나주 객사 망루에 반정부 대자보가 붙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라고 적혔다.
체포된 윤지는 영조가 직접 심문했고 나주는 물론 서울에 있는 소론 인사까지 모두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2월 25일 윤지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곤장을 맞아 죽었다. 3월 8일 영조가 창경궁에서 가마를 타고 남대문 밖 청파교까지 나가 그 아들 윤광철을 목베는 장면도 참관했다. 잘린 목과 팔, 다리를 거리에 걸도록 명했다. 윤취상,윤지,윤광철로 이어지는 3대가 멸문을 당했다.
2달이 지난 뒤 영조는 역적 토벌을 기념하는 특별과거인 토역정시(討逆庭試)를 실시했다. 영조가 직접 채점해 급제자 10명을 선발했다. 영조는 답안지를 읽다가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사리에 어긋난 현 정치를 비난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시험장에 떨어져 있는 종이 한 장도 영조에게 바쳤는데 그 종이에도 왕실 금기 사항인 선왕(先王)들 이름까지 적힌채 영조를 마구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답안지와 삐라의 주인은 1728년 무신란 때 처형당한 심성연의 친동생 심정연이었다. 27년이 지난, 괘서사건 처리 완료 기념 과거시험장에서 또 영조의 콤플렉스를 건드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영조가 직접 행한 심문에서 유생 심정연은 말했다.
“내 일생 동안 가진 생각이기에 시험장에 들어오기 전 이미 써둔 글이다. 여하간 왕에게 음흉한 말을 했으니 내 흉한 마음이 탄로 났구나.” 하며 비아냥 거렸다.
남대문 밖 청파교에서 역적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어 윤혜가 끌려왔다. 체포와 함께 압수해온 문서 한 장에 역대 왕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까닭을 묻자 윤혜는 “내 아들 이름 지을 때 참고하려고 썼다”고 답했다. 진노한 영조가 매우 치라 명했다. 윤혜는 혀를 깨물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론 원로 영부사 김재로가 영조를 말렸다.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에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십니다.” 영조가 소리를 질렀다.
“급하게 해도 실토하지 않는데, 느슨하게 하면 실토하겠는가!”
이성을 잃은 영조는 서둘러 궁궐을 나가 종묘에 이르자 가마에서 내려 땅에 엎드리며 “내 부덕함이 종묘에 욕을 보였으니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고 울었다.
광통교에 구경 나온 노인들에게 말했다. “올해에 또 남문에 가니, 너희들 보기가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외쳤다. 영조는 갑옷을 입고 남문 누각에 나타나 대취타가 울려 퍼진 후 왕이 윤혜에게 “문서를 누가 썼는가” 물었다. 윤혜는 “심정연이 짓고 내가 썼다”고 자백했다.
영조는 문무백관을 차례로 기립하라 명한 뒤 훈련대장 김성응에게 윤혜를 참수해 그 목을 매달아 바치라 명했다. 영조는 울면서 말했다.
“이 어찌 내가 즐거이 하는 일이겠는가!” 미쳐서 날 뛰었다. 영의정을 지낸 판부사 이종성이 영조를 말렸다. “하급 관리가 할 형 집행을 어찌 지존께서 하시나이까.” 영조는 탁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대는 나를 하급 관리 취급하는 것인가?” 전직 영의정 이종성은 충주목으로 부처형을 받았다. 형 집행을 느리게 한다며 훈련대장 김성응을 곤장을 치고 충청도 면천군으로 부처형을 내렸다.
윤혜의 목을 깃대 끝에 매단 뒤 밤새도록 남문 하늘 위로 취타 소리 날렸다. 왕은 날이 샐 무렵에서야 천막에서 나와 취타를 그치게 하고 갑옷을 입은 채 궁으로 돌아갔다. 애꿎은 윤혜의 형제 셋도 이날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역적 소굴을 밝힐 일을 논하다’, ‘복주되다’, ‘효수하다’, ‘국문하다’, ‘국문하고 효시하다’, ‘형신하다’, ‘물고되다" 1755년 5월 ‘영조실록’ 기사 제목들은 끔찍하다. 역적 혐의로 처형하고, 이때 많은 소론들이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당했고 오직 노론들만 오래도록 권력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해 조선망국을 자초했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