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혁(改革)의 아이콘! 정암(靜巖) 조광조(趙光祖) 이야기

칼럼
조선 개혁(改革)의 아이콘! 정암(靜巖) 조광조(趙光祖)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3. 04.27(목) 11:43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조선 왕조 500년 이래 최고의 사대부(士大夫)로 정암(靜巖) 조광조(趙光祖)를 꼽는다. 본관은 한양, 호는 정암이다. 1482년 한성 출생으로 개국공신 조온의 5대 손이다.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 어머니는 여흥 민씨다. 17세 때 역참(驛站)을 관리하는 종6품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종직의 수제자 한원당 김굉필에게 수학해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首)가 되었다.
오직 공부에만 전념해 어린시절 ‘광인(狂人)’이라는 별명속에 친구들과도 일체 교류를 끊은채 항상 의관(衣冠)을 단정히 갖추고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따라 매사를 절제했다.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입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다. 같은 해 다섯살 아래인 생원과에 장원한 화순 출신 학포 양팽손과는 소과 입격동기로 평생 절친으로 지냈다. 학포의 아들 송천 양응정은 정암 조광조의 제자로 훗날 이이 율곡의 문과 시험관으로 좌주문생(座主文生)이 되어 기호학파(機湖學派)를 형성 영남학파(嶺南學派)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성리학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에 일조를 한 인물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자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성균관 유생들과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정암은 오직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강하게 역설했다. 사간원 정언이 되어 언관(言官)으로서 그의 소신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 해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었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이 중종의 정비(正妃, 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했던 공신 박원종의 처벌을 대사간 이행이 강력히 상소했는데, 이 때문에 이행의 탄핵이 받아 들어 상소자 김정과 박상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임금에게 용기내어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다."라 주장하며 오히려 대사간 이행의 파직을 주청(注請)이 받아 들이자 정암의 존재가 부각되고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원로파, 즉 반정공신들과 신진사류(新進士類)간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그 뒤 수찬을 역임하고 곧이어 정랑이 되었다.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강력히 건의 하였다. 주자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시헝에 도 사장에 치중했고 도학(道學)은 경시되었다. 조광조가 정계에 입문하면서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했고, 정암의 주창을 계기로 당시의 학풍은 점점 변화되어 갔으며, 이황, 이이 같은 대학자들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암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家禮)를 지키게 되어 상례(喪禮)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군왕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하여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격서를 혁파했다.
그 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으로 실시하게 하여 김식, 안처겸, 박훈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 박상, 이자, 김구, 기준, 한충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앉혔다.
그는 이처럼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켜이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들을 공격했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성희안 등 반정에 참여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간신 유자광은 그의 척족들의 출세를 위해 반정공신의 반열에 올렸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고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주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등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너무 많으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했으나 쉽게 받아들이질 않았다.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다지 반색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2,3등 공신(功臣)들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勳爵)이 정암이 이끄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 개혁은 마침내 해당 훈구파 세력들의 눈이 뒤집혀 강한 반발로 이어졌다. 이에 훈구파 대신인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경빈박씨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뒤에서 조종하였다.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 호조판서 고형산 등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는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도한 주문과 상소에 염증을 느껴오던 중종이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인것이다.
정암 조광조는 김정, 김구, 김식, 윤자, 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 김식, 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간곡한 상소로 화순 능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이 파직되고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 남곤, 이유청이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12월 사사되었다. 이 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조광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크게 샀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인 중종 이역이 왕도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은 까닭에 그릇이 너무 작고 공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손아귀에서 끝내 벗어나질 못한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했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고 평하였다.
정암 조광조와 남곤은 같은 고향에, 스승 김종직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선후배 친구 사이였다. 둘 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쓴 신동으로 사마시와 대과에 같이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남곤은 11살이나 어린 고향 후배 조광조가 중종의 신임을 받아 자기보다 더 잘 나가자 이를 참지 못해심정, 홍경주, 경빈 홍씨 등과 결탁해 궁중의 나뭇잎에 기묘한 재주를 꾸며 기묘사화를 일으켜 개혁을 주도하던 친구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를 대거 숙청하는데 앞장섰다.
그후 남곤은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되었으나 남곤의 졸렬한 모습을 지켜본 고향사람들과 한양 조씨들은 새우젓을 남곤과 심정의 이름을 따서 '곤쟁이 젓'이라 부르며 남곤과 심정을 간신이라 저주했다 전한다. 그 후 남곤은 죄를 자책하고, 화를 입을 것을 걱정하여 평생 써놓았던 글들을 모두 불 태웠고 사림파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 역시 탄핵을 받아 1558년(명종13) 삭탈후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는 인과응보를 치뤘다.
정암은 선조(宣祖) 초(初)에 신원(伸願)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학문과 학덕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 1576년 희천에 양현사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서 그를 추모하는 많은 향사(享祠)가 세워졌다. 율곡 이이에 의해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렸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정암이 몸 담았던 사헌부는 조선시대 3사의 하나로,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곳이다.
사헌부의 기능은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관리의 공과 고찰. 포상, 탄핵하는 일이다. 사헌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교적 이상정치(理想政治)의 구현에 있었다. 특히 간쟁은 왕의 언행에 잘못이 있을 때 바로잡는 주요 일이다.
탄핵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는 것으로서 잘못을 저지른 관원을 탄핵하여 직위에서 축출하는 행위이다. 시정은 당시 정치의 시비를 논하는 것이요. 인사는 부정한 인사에 대해 탄핵을 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은 사간원, 홍문관도 함께 수행했으므로 이들 3개의 관청을 대간이나 3사(三司)라 불렀다. 중앙정치의 언론기관으로서, 그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이나 신권의 독주를 막고 균형있는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3사의 언론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면책의 특권도 누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사헌부도 서인 노론당 일색으로 세도, 외척정치를 구축하며 자기세력을 정착하는 기관으로 전락 되어 결국 조선을 망치는데 일조했다. 사헌부 관원은 청요직이라고 해서 재주가 뛰어나고 기개가 뛰어나며 곧은자만을 임명했고 문과 합격자만 가능했다.
사헌부의 최고 수장은 종2품 대사헌으로 정승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한말까지 존속되었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사간원과 함께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으로 개편되었다.
정암 조광조가 사림의 영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은 1515년부터 1519년까지의 만 4년 동안의 짧은기간이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흔들림없는 중종 임금의 계속된 신임속에 그가 꿈꾸었던 개혁이 완수 되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으리라 확신하며 아쉬움 또한 크다. 정암의 개혁이 실패 후 그 후 조선은 개혁다운 개혁은 한 번 도 이뤼지지 않은 채 끝내는 서인 노론들의 일당독재와 척신들의 세도정치와 탐욕으로 조선망국을 자처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완전한 개혁을 한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은 아닌, 요원한 희망사항 같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