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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소금강(小錦剛)이라 불리는 월출산(月出山)이 한 눈에 바라보이며 오봉산(五峰山)이 배산(背山)으로 영보촌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연촌이 관직을 사진한 후 영보촌에 내려와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사위 신후경과 함께 지은 정자다. 15세기 중반에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당시의 규모도 명확하지 않으며. 처음 지었던 정자가 1597년 정유재란때 소실되어 후손인 최정과 외손 신천익(1592∼1661)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다 전한다. 정자는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다.
네 귀에는 추녀를 찰주로 받치고 있고 영보정 현판은 석봉(石峰) 한호(韓濩)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영보정은 존양루와 함께 강학소와 누정으로서 조선의 선비정신과 항일구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큰 장소로, 일제강점기 1921년에는 이곳에 영보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 구국정신을 배양시켰다. 또한 영암지역 청년들의 항일투쟁활동인 1931년의 '형제봉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이곳에서 마을축제 풍향제(豊鄕祭)가 열리고 있으며 그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 받아 보물 제205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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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촌 최덕지는 1384년(고려 우왕 10)에 태어나 1455년(조선 세조 1)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이 전주이며 호는 연촌(烟村), 존양(存養)이다. 최용봉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참의를 지낸 최담이며 어머니는 박씨부인이다.
연촌은 조선 개국공신 양촌 권근에게 공부 했으며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한 뒤 사관(史官)이 되었고 김제군수, 남원부사를 지냈다. 김제군수때는 논공법(論貢法)을 상소해 세제(稅制))의 개혁을 건의했다.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圓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제대로 준비 못해 유배의 고초도 잠시 겪었다.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두루 거친 연촌은 도학(道學)에 출중해 유생들의 존경을 받았고 고려사 편찬에도 함께 참여했다. 남원부사를 끝으로 물러나 처가인 영암 영보촌에 내려와 학문에 힘 썼으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세종 이도가 죽고 1451년,
문종 이향이 즉위 후 연촌은
정3품 예문관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물러났다.
치사(致仕)할 나이가 아님에도 연로함을 핑게로 처가인 영암 영보촌으로 내려와 학문을 탐구하고 후학을 길렀다. 그가 머물던 누각의 편액을 존양당(存養堂)이라 걸었다.
조선 5대 임금 문종은 세자 시절 연촌 최덕지를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을 배웠다. 연촌이 예문(禮文)에 뛰어남을 문종은 알았고 선비로서의 자질과 품성이 구별되었기에 존경하고 총애했다.
훗날 선비들은 연촌이 계유정난의 기미를 미리 알고 몸을 보전하였다며 그의 선견지명과 절개도 칭송했다 한다.
연촌이 사임 후 한양을 떠나올 때 사육신 등 집현전의 석학 28명이 노량진 나루터 까지 나와 시(詩)로써 연촌의 학덕을 칭송하며 송별을 위로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연촌을 흠모하는 글 40여편을 모아 근보 신숙주가 문집으로 만들어 전해 주었고 훗날 숙종 임금도 '연촌의 도학이 주자와 같다.' 하여 중국 백록동서원의 ‘녹동’을 사액해 그를 녹동서원의 주벽으로 모시도록 배려했다.
존양루의 현판은 안평대군 이용의 친필이며 낙향할 당시 노량진에서 송별했던 류성원, 이개, 하위지,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서거정, 김종서 등 28인의 송별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영보로 낙향한 심경을 연촌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청산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로 낚싯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자연 속에서 선비로서 유유자적하며 세속의 탐욕을 멀리 하며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유감없이
읊은 것이다
존양당(存養堂) 우측에는 양반들도
'각진 삶을 살아가라.'는 뜻을 담아 4각형의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존양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약자로 '스스로 성찰(省察)하며 존성(存省)을 하고, 본성을 함양하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기미까지 살펴야 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연촌의 문하생인 조선 중기의 문신 이었던 금정출신 응소(應韶) 민덕봉(閔德鳳 1519 ~ 1573)이 존양당에서 공부해 연촌과 후손들의 청렴결백한 생활을 이렇게 읊었다.
'다락문 닫고 다만 조용히 공부를 하고자 하니
낮은 처마 작은 창이 겨우 무릎을 펴고 오그릴만 하네
선정께서는 벼슬이 높았으나 거실은 누추한데
지금은 농삿집들도 또한 궁궐같네.'
또한, 연촌의 가르침을 받아 과거 급제하고 퇴임 후 노송리 에 이우당(二友堂)이라는 정자를 건립하여 후학을 가르쳤던 예조참의를 지낸 영계(瀯溪) 신희남( 1517∼1591)은 당시의 허황된 세태를 강하게 꼬집었다.
'작은 집을 짓는데 어찌 자귀와 대패가 필요하랴
도리에 통달한 사람은 오직 자기 성공길만을 생각해야 하네
세상이 말세가 되어 이 뜻을 알지 못해
벼슬이 높음에 누가 궁궐 같은 집을 바라지 않겠는가.'
이처럼 이곳 존양루에는 연촌이 관직에 있을 때 함께 지냈던 선비들이 연촌의 낙향을 아쉬어 많은 아쉬움의 시를 건냈다.
사육신(死六臣)이었던 취금헌(醉琴軒) 박팽년( 1417~1456), 낭간(瑯玕) 유성원( ?~ 1456), 매죽헌(梅竹軒) 성삼문(1418~1456), 백옥헌(白玉軒) 이개( 1417~1456) 등의 시문이 남아 있고 현판도 세종의 셋째 아들인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1418~1453)의 친필이며 연촌과 송별의 감흥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네 아들이 집을 이어 높은 빛으로 바뀌니
노년에 삼락이 쌍전하구나
관에서 물러나와 도흥경에 내리지 않으시고
시를 질때는 도리어 맹호연 같도다
허백당중의 잔치에 항상 편안하게 쉬고
연분홍 티끌속에 오래도록 머므르리
선생이 일즉 귀거래를 부르시니
보이지 않은 조주길이 팔천리나 되구나.
매죽헌 성삼문도 뒤질세라 시를 지어 전송했으니
'전원에 돌아가는 것은 은퇴가 아니라
나오고 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네
한 나라 임금께선 소광(疏廣)을 생각하고
당 나라 조정에선 공규를 중히 여겼다오
강산이 그를 기다리는 듯
원숭이와 새도 또한 알아주네.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를 다했으니 공과 같은 사람 바로 나의 스승이라네.'
취금헌 박팽년은 "한 세상을 움직일 만한 공명과 부귀를 가졌더라도 변변찮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또한 낮추고 겸손하여 자신도 가눌 수 없을 듯해도 천하 후세의 인망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 있는데, 선생이 귀향을 구하니 선생을 알거나 모르거나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흠모했고
백옥헌(白玉軒) 이개( 1417~ 1456)도
'최덕지는 영리와 명예가 따름을 싫어하였다.' 평했다.
우리 영암 선비정신의 뿌리는 연촌이며 그 시발점은 존양루와 영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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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의 잘못된 역사를
행동으로 과감히 항거한 연촌의 올곧은 정신이
영암의 후세들에게 배었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러울때 마다 영암인들은 의로움을 행동으로 실천했었다.
혈연, 학연으로 얽혀진 영암의 선비들은 영보계와 대동계 모산계를 규합해 향촌질서를 바로잡았고 의(義)를 강론했으며 구국운동의 기치를 들었다.
임진왜란때 의병운동을 일으킨 양달사 장군의 뒤를 이어
1907년 정미의병운동도 국사봉을 근거지로한 영암출신들이 주도했던것이다.
고종의 칙령에 의해 의병 해산령과 일제의 잔인한 전라도대토벌작전으로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며 은거했던 반촌의 유생들은 신학문을 공부시키기 위해
자식들을 서울.광주.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신학문을 배운 엘리트들은 당시 각광을 받았던 레닌의 사회주의사상이 일제로부터 벗어나는 독립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단편적 판단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심취해 참여했고 해방 후 맥아더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친일과 반공노선으로 6.25 남북전쟁때는 일부 세력들이 사회주의에 물들어 빨치산이 되어 좌우대립의 희생자가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신북의 모산, 군서의 구림,
덕진의 영보는 당시 '영암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리울 정도로 사회주의운동에 물든자들이 많았고 대부분 양반가의 자녀들로 유학을 해 신학문을 공부했으나 시대가 그들을 포용치 못해 빛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비참히 사라졌다.
또한 영보정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정신을 강론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21년에 영보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정신을 배양했기에 1931년의 '형제봉 만세운동'이 영보정에서 태동했다.
그 과정은,1926년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일제에 의해 해방운동 영암중앙본부가 강제로 해체되자 기회를 엿보던, 곽명수, 최판옥이 영암지방 사회운동을 규합하고자 광주학생운동 참여자들의 석방 시기를 노리다 동경에서 오랫동안 유학하던 김판권이 1931년 7월 고향으로 귀국해 최판옥, 곽명수 등 영암지역 청년들과 함께 사회주의운동 조직체를 재건했다. 이들은 보통학교 동창회와 마을 청년회, 야학회, 소작상조회의 조직을 활용하며 적색노동조합도 창설해 사회주의 이론을 주입하며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파극과 강습회도 곁들이며 민족의식을 계몽하고 한글을 가르치고, 소작인들의 행동강령도 만들었다.
1932년 4월 영암지역의 사회운동을 통합적으로 전개코자 '영암 공산주의자협회'를 결성했고 농민, 노동자, 청년들을 참여시키며 소작권 문제에도 개입했다. 지주와 마름이 소작권을 장난치는 사태가 그치지 않자 문제의 토지를 공동경작해 농민들에게 되찾아주기도 했다.
마침내 1932년 6월 4일 김판권, 최판옥은 영암지역의 청년 70여명과 함께 형제봉에서 농민봉기를 했다.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고, 지주의 횡포에 맞설 것을 독려했다. 부당한 소작권 이전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키 위해 가두시위와 행렬도 벌렸다. 지주의 집에 찾아가 토지제도의 부당성을 성토하며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아라”,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 “일본인들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일제경찰대가 출동하여 시위에 참가한 100여명을 검거했다.
재판에 회부된 숫자는 70여명에 달했고 대부분 실형이나 벌금형을 받았다.
그로부터 90여년의 세월이 지난 2021년 까지도 항쟁의 주모자들이 좌익사상자들이라고
군사정권과 보수정권에서 포상을 거부해 오다
만시지탄으로 2021년 우승희 현 영암군수의 끈질긴 노력의 결실로 마침내 40여명이 포상을 받아 국가유공자로 선정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이를 계기로 의병운동 현창사업 및 영보정사건을 재조명하여 후세교육에 본을 삼아야 할것이다.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이사.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