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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3년 태봉국(泰鳳國)의 장수 왕건(王建)이 수군을 이끌고 황해를 따라 내려와 후백제 견훤의 세력권인 금성을 공격했다. 왕건은 후백제군에 대승을 거두고 금성과 10여개 군현을 빼앗은 뒤 금성의 이름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견훤의 후백제 군대가 금성 지역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가혹한 세금을 강요하자 금성의 호족들이 궁예에게 보호를 요청해 왕건이 총사령관이 되어 육지전과 해상전 등 세 차례 치뤄진 전투로 왕건이 승리했다.
이때 금성의 나주오씨, 영광의 영광전씨, 영암의 낭주최씨 등 해상세력들과 일부 남쪽지방 호족들은 왕건의 편에 가담했고 고려가 건국 후 이 지방 성씨들은 고려시대에 중용되었다.
조선이 건국하고 류차달의 후손인 조초청신(朝初淸臣) 하정(夏亭)류관 (柳寬)이 신북 모산리에 영팔정(詠八亭)을 아들에게 세우게 한 후 이를 계기로 이곳에 후손들이 터를 잡은 후 그의 5대손 모강공 유용공의 슬하에 류몽벽, 류몽익, 류몽두, 류몽정, 류몽삼 다섯 아들을 두었고 이 아들중 류몽정과 류몽삼이 신북 모산에서 출생해 기거해 모산은 문화류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청계 류몽정은 금정면 청룡리 산 122번지(내산로 953) 청계동 석대위에 작은 서재를 짓고 망경대라 부르고 은거하여 학문을 탐구하며 후학을 기르며 강론했다. 망경대에서 청계 류몽정은 아침저녁으로 한양을 향해 망배(望拜)하며 나랏님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기축옥사에 무고로 연좌되어 장독으로 옥사 후 34년이 지난, 1623년 복권되었다.
청계 류몽정이 신원된것은 그의 아들 류호 때문이었다.
류호는 일찌기 진사시에 입격 후 사옹원 참봉으로 있을때 임진란이 일어나자 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또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공을 세워 조정에서 관직을 제수하자 세번이나 글을 올려 "원하건데 신의 관직은 내버려 두고 아버지의 벼슬을 회복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청원했다. 그리하여 돌아가신 아버지 청계 류몽정이 마침내 신원(伸願)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신원되자 류호는 고향에 돌아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고부현감 시절 류몽정은 전주로 낙향한 정여립이 곤궁해 아버지 제사때 제사상 차림도 어렵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관례에 따라 곡식을 몇 되박 주었는데 이로 인해 류몽정은 송강 정철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해 옥사했다.
당시 선비들은 유생들의 선친제사에 제물을 보낸 것은 흔한 일이었다. 정여립을 직접 만나 곡식을 준 것도 아닌, 곡식 몇 되박을 선친제사에 부조한다는 편지와 함께 보냈는데 그 편지를 꼬투리 삼아 청계를 죽였던 것이다.
또 다른 야사로는 담양에서 소년시절 청계 유몽정이 송강 정철을 만났는데 정철이 류몽정에게 자기가 왕족이라고 거만을 떨자 7살 아래 송강에게 꿀밤을 한 대 주었다.
집에 돌아 와서 어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어머니께서는 "꿀밤을 줄 때 정철이 웃더냐? 화를 내드냐?" 하고 물으셨다. 정철이 웃었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화를 냈으면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웃었다고 하니 크게 염려되니
앞으로는 정철을 만나거든 고개 숙이고 심히 조심하라." 간곡히 타일렀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 유몽정이 남원부사 때 전라도 관찰사였던 정철에게 무슨 연유에서인지 문안 인사도 가질 않았다. 정철은 이런저런 지난 사연으로 감정이 쌓여 벼르던차 류몽정이 역모사건에 걸려든것이다.
1589년, 선조 연출, 구봉 송익필 각본, 정철이 감독해 호남 선비 천 여명을 무고하게 죽인 전대미문의 드라마가 기축옥사요. 사건의 장본인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아들과 함께 자결했으나, 문제는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살아 남은 호남의 선비들이었다. 특히 정여립과 가까웠던 동인 영수 이발이 역모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이 이발의 광산이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그의 형제는 물론이요.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도 억지로 연루시켜 참화를 당했다.
이 옥사를 주도한 정철에 대한 그 한이 오죽했으면 지금까지도 광산이씨와 연일정씨는 혼사는 물론이고 한자리에 앉는것도 꺼려하며 힘겹게 살아남은 광산이씨들은 기제사에 고기를 다질때 마다 '훙철! 악철!간철!'이란 저주의 주문을 외울 정도로 원한이 사무쳤다 한다.
기축옥사는 사실상 정여립과 편지 등으로 서로 교류하다 연루되어 죽은 선비들을 제외하면, 실로 역모에 가담한 사람은 황해도에서 잡혀온 농민 몇 명뿐 역모를 꾀했다는 물적 증거는 단 한가지도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잡혀온 관련자들의 혹독한 고문에 의한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였고 정여립은 자신의 역모사건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죽도로 갔다가 서인이 보낸 자객 민인백에 의해 살해 되었다.
정여립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도 전주인데 황해도 관찰사가 역모를 고발했으며. 당시 조선 조정은 동인이 정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상황 이었으므로 동인이었던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할 하등의 이유가 되질 않았다고 남인측들은 주장했다.
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던 사람들은 정여립만 빼고 훗날 대부분 신원이 되었다.
역모사건의 최정점에는 길삼봉이란 전설적 인물이 있었는데 정여립을 길삼봉 다음의 역당 괴수의 서열로 몰고 수사를 했다.
전국에 비상망을 내려 수괴 길삼봉 체포에 전력을 다했으나 조선이 망할 때까지 길삼봉은 체포되지 않았고 그의 정체는 끝내 미스터리였다.
길삼봉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정여립을 역모로 모함하기 위해 서인들이 조작해 낸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고 일부 사학자들은 주장하기도 했다.
기축옥사의 추관은 정철이었고, 서인 백유함과 이춘영이 추국을 도왔다. 이들은 옥사를 주관 하면서 서인인 자신들과 평소 생각이 다른 동인들을 모조리 연루시켰으며 심지어는 동인 출신 영의정 서애 류성용 까지도 혐의를 씌우려 했으며 기축옥사때 가장 큰 피해자는 곧은 선비로 평판이 났던 이발, 정개청, 최영경 이었다.
정여립은 스승인 이율곡이 죽자 갑자기 서인에서 동인으로 돌아서면서 스승 율곡을 비판하며 동인의 실세 이발과 친해졌고 서인들의 눈에 저주의 가시가 되어 버티지 못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로 귀향 후 대동계를 조직해,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언급한 파격적 언행으로 세상사람들의 이목을 되어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발은 알성시에 장원급제한 수재로 정여립과 끌어 기질상 잘 맞았다 한다.
이발의 부친은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중호고, 이발의 형제들은 모두 벼슬에 올랐다
이발은 중후하고 성격이 분명해 시비를 가리길 좋아했다. 이발은 정여립과 가깝게 지냈다는 죄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이발의 친족들도 모두 잡혀와 고문을 받았는데, 이발의 어머니 정경부인 윤씨는 나이가 82세였으나 압슬형을 받아 죽었으며, 여덟 살이었던 이발의 어린 아들까지도 임금 선조에게 당당히 대들었다는 죄목으로 맞아 죽었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과대포장하며 확대 재생산한 선조의 꼭두각시 정철은 머리가 좋았고 문장력은 뛰어났으나 직선적이고 다혈질이었으며, 시기와 질투심이 많아 포용력 없는 옹졸한 인물이라고 일부 사가들은 가혹히 평가했다.
당쟁이 일어나자 서인이 된 정철은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내야 했고, 남의 허물을 보면 가까운 사람이라도 조금도 용서치 않았다.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 종일 술에 취해 있어 조정에서 공무를 볼 때도 사모가 한 쪽으로 기울어지 는 애주가였다고 한다.
정철은 동인 축출의 공을 크게 세운 후 좌의정으로 승진해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나, 선조도 과격한 정철을 점점 싫어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동인 이산해와 유성룡이 세자책봉 문제를 정철에게 간언하도록 부추긴 후 동인들의 계략에 걸려 정철은 선조에게 혼자 간언하다 파직되어 유배길에 올랐다.
서인의 영수인 정철이 유배되자 서인들은 다시 몰락했고 동인들이 다시 득세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3년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선조의 피란길에 정철은 사면 되었다.
전란의 책임을 져 동인 이산해가 파면 되고, 서인 윤두수가 좌의정에 오르면서 다시 서인시대가 시작 되었고 1592년 9월 정철은 체찰사가 되어 기호지방과 호남으로 내려가 군무(軍務)를 독려 했으나, 정철을 모함하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또 다시 파직되어 강화도로 쫓겨가 결국에는 입에 풀칠 조차 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58세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임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즉위 후 북인 정인홍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기축옥사 당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을 추진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기축옥사는 서인들에 의해 모반사건으로 계속해서 남게 되었다.
기축옥사 이후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으며, 이후 오랫동안 호남 출신들은 정치, 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호남인들은 국가가 환란에 직면할때면 여기저기서 의병의 기치를 들고 목숨을 건 의병항쟁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약무호남(若無湖南)이면 무시국가(無是國家)”라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호남을 높이 평가했다.
더군다나 같은 의병이라도 호남출신 의병들은 참여나 거의(擧義)가 아니라 싸우다 순절(殉絶)을 했다. 다른 지역의 의병들은 난후에 높은 관직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간 사람들이 많았지만 호남의병들은 거의가 전란 중에 순국했다.
비뢰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몽진하였건만 호남의 선비들과 백성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다 몸으로 실천하며 행동화 해 충성심을 보여 주었으니 그 본보기가 청계 류몽정과 그의 아들 류호 선비였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