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히 감결류(鑑訣類)와 비결서(秘訣書)에 미륵신앙(彌勒信仰)을 표방하는 서적들이 백성들 사이에 은밀히 읽혀 졌으며 같은 내용의 이본(異本)도 헤아릴수 없이 속출했다.
그중 대표적인 예언서가 바로 정감록이었다.
정감록으로 치는 문헌으로는, 감결(鑑訣),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화악노정기(華岳路程記), 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 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 무학비결(無學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징비기(徵秘記), 토정가장비결(土亭家藏秘訣),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 삼도봉시(三道峰詩),옥룡자기(玉龍子記) 등 수십 가지의 책들이 내용을 조금씩 다르게 꾸며 백성들 사이에 떠돌았고 또 저자(著者) 나름대로 자유자재로 미래를 설정하며 구원자(求援者)의 출현을 그렸다.
대부분의 감결류나 비결들이 조선왕조의 타도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발각되었을 경우 혹세무민죄로 중벌(重罰)이 내려졌고 관원(官員)들의 기찰이 심했다.
그래서 은밀하게 서적들은 유포되었다. 거사를 도모하는 인사들은 각 고을을 염탐하여 동지(同志)들을 규합하기 위해 종교적 포교 할동이나 친목계 조직을 표면에 내세우며 위장해 필요한 대상자를 물색해 의도적으로 접근해 세상살이을 걱정하는 등 대의(大義)를 재창(再唱)하는 방법으로 동조자들을 포섭한다.
포섭하는 과정에서 포섭 대상자의 고발로 탄로나거나 포도청이나 의금부 등 정보기관의 요원들에게 발각이 나 요절이 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엽관적 퇴물관료나 불평불만의 잔반세력들과 신분 상승을 꿈꾸는 지방유지와 재력가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학연, 혈연, 지연을 교묘히 파고 들며 여러차례의 접촉활동을 통해 본래의 거사의도(擧事意到)를 숨기고 北伐이나 洋夷를 물리치기 위한 의병을 거의한다는 명분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특히 한양에서 소외된, 삼남지방이나 평안도 이북 등 특정한 지방에 이미 팽배해 있거나 잠재된 반정부세력들을 대사으로 파고 들어 세(勢)를 형성해 최종 목표는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은 거의 대동소의했다. 멋진 격문(檄文)
을 각지에 띄우면 여러 지방에서 합세해 올 것이라는 환상(幻想)을 품은 채 격문 작성이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정감록 이전, 최초의 우리나라 풍수서인 도선비기는 우리고장 영암 출신 도선국사(道先國師)가 만들었다는 비기로, 고려국 태조 왕건의 고려건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책이다.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고려사(高麗史)에 도선비기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현전(現傳)하는 것은 후대(後代)의 위작(爲作)으로, 많은 서적들이 도선의 명성을 빌려 그의 이름과 제목까지 인용했다고 전한다.
정감록도 지은이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으나 정확한 것은 없으며 고려왕조가 망하고 이씨왕조가 들어서자 세상에 출현한 책이다. 이씨왕조에 대해 반왕조적이며 성리학 위주 통치절학에 따른 사대부 중심의 갑질정치와 신분차별 주의를 거부하며 대동세상(大同世上)을 꿈꾸었던 조선시대 금서(禁書) 1호에 속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은밀히 익혀졌고 전해 내려 왔다.
정감록의 저자를 정감(鄭鑑), 혹은 이심(李沁)이라고 하나, 그 정확한 실체는 알수 없고 다만 정감록의 그 내용이 정감과 이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형식(對話型式)으로 꾸며진 까닭에 지은이로 오인된것 같다.
혹자는 삼봉 정도전(鄭道傳)이 부패한 고려를 무너 뜨리고 새로 건국한 이씨조선 왕조의 역성혁명(易性革命)을 합리화하고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지어냈다는 설(說)도 있으나 시대상으로 볼때 불분명하나 삼봉 정도전의 그 인간 됨됨이를 살펴 볼때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정감록의 형식은 예언설, 참요(讖謠), 역수(易數)풀이, 풍수지리설 등 다양하며 독자들 수준에 맞춰 흥미있게 구성되었고 그 배경사상도 성리학적 고정 관념을 탈피해 도교, 불교, 참위설, 음양오행설 등 다양한 학설들을 인용하고 과감히 받아 들였다.
오랜 세월 동안, 수 많은 저자들에 의해 각색되어 새롭게 만들어지고, 민간 세상에 암암리에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요인은 조선 왕조 사대부들의 성리학에 입각한 신분제도의 모순과 상민과 천민들에 대한 사대부들과 소수(小數) 벼슬아치들의 갑질이 극심해 반유교적 사회 계층 세력과 핍박받던 하층민들이 저변에 많이 깔려있었고 거기에다 몰락한 잔반들이 미륵의 출현을 고대하며 이씨 왕조 교체를 소망했고 1589년 기축옥사의 주모자로 몰린, 전라도 전주 사람 정여립의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에다 사회변혁의 법칙을 우주론에 입각한, 운세(運世)의 법칙을 결부시켜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대동세상을 도모코자 했던것 이다.
정감록은 인쇄물이 아닌, 사본으로 필사해 수전(手傳)되어 왔으며, 독자들의 기호와 요구에 따라 첨삭이 갈수록 가해져 혹세무민과 민심을 부채질하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정감록 등 비결이 가장 많이 범람한 시기는 외적의 침입에 의하여 사회가 혼란하고 연이은 흉년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많았던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후기다.
날이 갈수록 정감록을 많이 찾았고 살기가 어려울수록 새 세상의 출현을 학수고대 했던것 같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파고 들어 과거에 낙제한 먹물 든 일부 실직자 잔반(殘班)들과 기인(奇人)들은 생계 해결의 수단으로 정감록을 각색하고 필사(筆寫) 해 이본(異本)들을 많이 만들어 책방에 공급했다.
서적에 등장하는 지명들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지명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조선 초기 성종때 까지는 정감록이 불온서적인 분서목(焚書目)에 포함되지 않았다.
인조실록에도 ‘초포조입 계룡건도(草浦潮入鷄龍建都)’라는 문구의 계룡산 천도설까지도 등장한다.
정감록은 난세에 풍수설에 따라 점을 쳐서 정하는, 복정(卜定)에 의해 피난처와 그 대비책도 강구해 기술했으며 머지 않아 세상에 정씨(鄭氏)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이씨 왕조는 멸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는 예언을 했다. 멸망에 대비한 시끄러운 피난처의 이상경(理想境)에 대한 동경이 정감록에 그려져 있었다.
자연지리적 조건을 음양오행설과 교묘히 결부시켜 풍수지리설을 적용해 짜 맞추기식으로 구성했다. 표현 기법도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은어(隱語), 우의(寓意), 시구(詩句), 파자(破字)를 사용하여 해석이 난삽하고 애매한 표현이 많아 이현령 비현령식의 소위 아니면 말고의 정확성과 사실성이 결여 되었다.
처음에는 병화(病禍)를 피하는 소극적이고 은둔적 사상을 민심에 우합(偶合)시키다가 조선 후기로 내려갈수록 반왕조적 색깔로 변해 반란이나 민란들의 유언비어는 정감록의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은 단골메뉴였고
그 주모자들은 모두 자기자신이 정도령의 진인이요. 미륵이라고 자처해 민중들의 환심과 이목을 끌다가 끝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19세기에 발생한 서북지방의 홍경래난과 삼남지방의 민란들은 모두 정감록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으며 동학농민혁명 등 종교운동과 사이비 이단 종교들도 그 저변과 출발을 정감록과 비기들에 그 맥(脈)을 같이 했다 .
정감록은 정본(正本)이 없다. 단지 온갖 도참서들의 원형(元型)이라 추측하는 감결(鑑訣)은 그 내용이 조선이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 앉아 세상 들아가는 일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대화형식으로 엮어졌다.
삼봉 정도전이 저술했다고도 하고, 또는 고려말 억울하게 죽은 포은 정몽주나 그 후손들이 썼다는 설도 있으나 분명한것은 조선왕조 건국 후 불안한 민심을 그 배경으로 집필되었다는 대해서 는 일리가 있다.
정씨 성을 가진 정도령이 부패한 현 왕조를 뒤엎고 살기좋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는 줄거리는 16세기 말, 기축옥사를 발발한 정여립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견해도 많았다.
또한, 인조 9년(1631) 2월 3일자 인조실록에 의하면 옥천에 사는 권대진이라는 자가 예언을 믿고 모반을 일으켰는데, 그와 한패 동지였던 권락과 권계 등은 '영남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두 어깨에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데, 이 사람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가야산 아래에 사는데, 이름은 한(澣)이고, 나이는 임오생(壬午生)이다.' 라며 유언비어를 날조했다. 또 다른 기록에는 권대진과 한 패인 양천식이 '기미년 사이에 지리산에 가서 글을 읽던 중 어느 날 기이한 사람을 보았다.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한(澣)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과연 새로운 도읍의 주인이 될 만하였다.'라면서 장차 충청도의 계룡산을 새 도읍지로 정하려 했다며 정도령의 출현을 부추긴 기록도 있다.
역사적 기록물에 정감록이 최초로 언급된것은 영조 15년(1739) 6월 9일자 승정원일기인데, 영조 이금은 "정감록은 도적들이 믿는 책이니 매우 교활하고 사악하다."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그 이전에도 정감록의 원형으로 추정, 포함되는 예언서들도 전해졌다.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 세조실록을 보면,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수찬기소(修撰企所),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들을 개인이 갖지 말고, 나라에 바치도록 명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문서들은 모두 정감록과 비슷한 내용의 예언서이고, 그렇기 때문에 조정에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불온한 문서로 간주하여 개인의 소유를 금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조정의 탄압을 피해 민간에서 계속 돌아다녔다.
정조 9년(1785)에 일어난 이율, 양형, 홍복영의 모반 사건에도 정감록이 등장한다.
심지어 정도령이 청나라에 대항해 명나라를 복원하려고 한 정성공이나 그의 아들 정경이라고 보기도 했다.
17세기인 숙종실록 숙종 23년(1697) 1월 10일자 '장길산의 난' 항목을 살펴보면 "중국인 승려 운부가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 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진인 신앙이 숙종 대에도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감록에 있는 "이씨가 망한다." 하는 구절로 보아, 이씨왕조에 반대하는 의도가 분명하다.
정감록이 성리학을 위시한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였으며 정감록은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신흥종교의 경전으로 활용되었다.
십팔자위왕설이 조선 건국으로 맞아떨어지자,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명분으로 새로운 도참설들을 각색해 만들고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사관에 물이든 자들은 억지로 끼워 맞춰 정(鄭)에서 오른쪽 부수를 뺀 글자는 존(尊)자 인데 이 글자는 원칙적으로 성을 사용하지 않는 일본 황실에서 황족 인명의 끝에 붙인다는 점을 들어 사실 정진인(鄭眞人)은 일본 천황이고 일제강점기의 일본 제국이 정감록이 예언한 정씨 왕국이었다고 억지 해석을 하여 식민사관을 부추겼다.
정감록의 내용들도 구구절절 각각 달라졌다
필사가 반복되면서 판본이 다양하게 형성되어 갔고 그 핵심은 조선왕조가 망하고 계룡산에 정씨가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정감록 모반 사건의 판본에서는 이씨가 망하고 김씨, 유씨, 정씨의 삼국으로 나뉘었다가 최종적으로 정씨가 통일한다고 씌었다.
다른 판본에서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8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5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7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 도읍 천년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서기 5천 년대까지 예언하며 조선 왕조가 망하고 정도령, 혹은 정진인이 새 왕조를 세우기 전까지 환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피할 십승지(十勝地)로 피난해야 한다고 했다.
십승지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 (豊基車巖金鷄東峽小白山兩水之間), 화산 소령의 옛터 청양현 봉화 동촌으로 넘어 들어가는 곳 (花山召嶺古基在靑陽縣越入奉化東村), 보은 속리산 네 등성이 인근 (報恩俗離山四甑項延地) = 말 그대로 속리산 산속, 운봉 행촌(雲峰杏村), 예천 금당실(醴泉金堂室), 공주 계룡산 유구와 마곡 두 물길 사이(公州鷄龍山維鳩麻谷兩水之間), 영월 동쪽 상류(寧越正東上流) , 무주 무봉산 북동방상동(茂朱舞鳳山北銅傍相洞), 부안 호암 아래(扶安壺巖下), 합천 가야산 만수동(陜川伽倻山萬壽洞),을 꼽았다.
십승지로 지목된 곳들이 대체로 남부 지방이며 해당 지역들은 대읍(大邑)은 전무하고, 상당수는 산속, 협곡, 바위그늘 등 일반적 거주지로서는 부적합하고 대신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들이다.
궁궁을을(弓弓乙乙)이란 주문은 동학과 조선 말이나 일제 강점기의 많은 신흥종교들이 각각 해석을 달리해 교리로 삼았던것 같다.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동학 접주 손화중이 선운사 마애좌불상 배꼽 아래에서 꺼냈다는 '비결록'이 정감록이었다는 소문도 크게 났다.
부근 배꼽에 봉인된 흔적이 있는데 이 안에 검단 선사가 비결록을 써 넣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말 전라감사 이서구(李書求)가 이 비결록을 꺼내기 위해 봉인을 풀었다가 하늘에서 갑작스레 천둥 벼락이 내렸고, 이서구가 책의 첫 장을 열어보니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연다."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서구는 두려움속에 다시 봉인(封印)하였고 19세기 말 손화중이 이 비결록을 가져갔다 전한다.
조선 말기로 갈수록 정감록을 신봉하는 백성들이 너무 많잉 늘어났는데,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 조선이 멸망(滅亡)하자 정감록의 내용들도 취사선택해 새롭게 구성해야 되겠다는 기인들과 도사들이 부쩍 늘어났다.
충청도 계룡산을 중심으로 이름도 기상천외하고 교묘한 특정신흥 종교집단들이 대거 출현했으며 3.8선 이북지방에 살던 백성들은 충청, 전라, 경상의 하삼도 십승지로 이주해서 터를 잡고 살았다.
이들은 6.25남북전쟁때 전란의 피해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정감록을 팔며 떠들었다. 낙동강 방어선 까지 북한 괴뢰군이 남침했으나 깊은 산골짜기까지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주한 북쪽 사람들은 이주한 새터전을 '감록촌'이라 부르며 감지덕지했다. 지금까지도 그때 생긴 마을들이 남아 있으며 그곳은 틀림없는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한 번 잘못 빠져들면 그 틀에서 결코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자신이 구세주나 미륵이 된것처럼 혹세무민하며 계율이나 성경을 제 맘대로 해석하며 수많은 성도들을 온갖 방법의 착취에 기만하고 유린하면서 성자인척 매스컴의 조명을 즐기는 일부 세습 종교지도자들과 이단 사이비 종교인들은 정감록의 허구성을 다시 한번 탐구하고 연구하여 종교인 본연의 자세를 견지 해야 할것이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