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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은 사실과 다르게 침소보대(針小棒大)한, 수 많은 야사(野史)들에 등장하는 음란한 탕녀로 알려졌으나 사실(事實)은 시, 서, 화에 능(能)했던 시인(詩人)이었고. 무희(舞姬)에 자유연애자 였다. 지체 높은 엄연한 사대부 양반가 출신 여성으로 비정상적인 왕족 남편 태강수 이동에게 이혼을 당한 후 유녀(遊女)가 되었으며, 조선의 패밀리급 왕족 4명과 수 많은 조정의 관료들이 연루된 성스캔들 사건의 장본인이였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로 왕족 정 4품 태강수 이동의 정실 부인이었으나 괴팍한 성격에 가정파탄자요. 파락호인 남편을 잘못 만나서 신혼 첫날밤 부터 외면을 받았다.
태강수 이동은 정실의 자식이 아닌, 소실의 늦둥이 외아들로 그의 부모들마저 통제 할수 없는 망나니였던 반면에, 어우동은 양반이었던 아버지 박윤창에 의해 금지옥엽 외동딸로 태어나 외동 아들 박성근과 함께 성별의 차별없이 정성껏 키워졌고 고위관료로 개방적인 사고방식의 박윤창은 여식인 어우동에게도 일찌기 소학(小學)과 사서(四書)까지 공부를 시켰기에 어우동은 시와 서화에 두루 뛰어났으며 가무(歌舞)에도 그 재주가 특출 하였다.
그녀의 주옥 같은 작품들은 탕녀의 작품이라는 조선시대의 사회적 편견으로 말미암아 거의 인멸(因滅)되었거나 실전(失傳)되었다.
어우동이라는 이름은 사실상(事實上) 첫 남자였던 의금부 종4품 종사관 오종년이 그녀를 만나 인연을 맺은 첫날밤에 선물한 애칭(愛稱)이었다. 어우동의 본관은 음성이요. 본명은 박구마(朴丘麻), 별칭은 어우동(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다.
어우동이 시댁에서 쫓겨난 이유가 어우동의 시댁에서 천민 은장(銀匠)이를 불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우동이 은장이의 체격을 보고 음심(淫心)이 일어나 계집종처럼 꾸미고 접근해 대낮에 통정(通情)했다고 남편 태강수 이동이 고변(告辨)하여 의금부에 끌려 갔으나 정황의 앞뒤가 맞지 않아 무고로 밝혀져 어우동은 석방되었고 오히려 남편 태강수 이동이 불이익을 당했다.
그 후 태강수 이동에게 쫓겨난 이후 어우동의 삶과 성에 대한 관념도 180도로 바뀌어 개방적인 자유연애를 구사했다. 결국 마흔살 때인 1480년(성종11), 어우동의 성문란 행태가 조정에 발각되어 사림파(士林派)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이덕숭(李德崇)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의금부로 다시 잡혀갔다.
풍기문란죄로 문초를 당했으나 어우동과 관계한 왕족들과 사대부들은 모두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어우동이 체포되어 모진 심문을 받게 되자 왕족 방산수 이난과 어미 정귀덕만이 어우동을 변호하였고, 방산수 이난의 권고로 어우동은 모든 사실의 전모를 자백했다.
그러나 끝까지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의 사대부 고관대작들은 혐의를 부인하였고 중인(中人)이었던 박강창과 문과 장원 급제자 홍찬 등만 하옥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우동의 처벌을 놓고 사형(死刑)과 유배(留配)로 주장이 둘로 나뉘어 실갱이를 거듭했으나 결국 사림파와 훈구파 모두 강경한 처벌을 주장해 그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결국 어우동 혼자만 죄를 뒤집어 쓰게 되었고 어우동을 비호 했다가는 자칫하면 연루자로 몰릴까봐 강한 입장을 고수한 양반들의 비열한 모습이 연출 된것이다.
어우동과 통정한 사내들은 모두 사면되었고, 어우동과 하녀만이 유배 후 결국 사형을 당해 조선 남녀 차별주의에 젖은 성리학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유감동, 이구지, 대방군부인 송씨 등과 함께 오래토록 부도(婦道)를 어긴 조선 여성의 대명사로 매도와 지탄을 받아야 했다. 또한 희빈 장씨, 장녹수, 문정왕후 등과 함께 조선사회 악녀(惡女)의 한 사람으로 강하게 비판 받아오다가,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야 어우동은 복권(覆權)이 되었다.
어우동은 조선의 태평성대인 성종때에 한양과 조선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조선시대 일부 양반들의 전유물이요. 특히 양녕대군 같은 왕족들은 유부녀든 처녀든 기생이든 심지어 왕의 여자인 궁녀까지 농락했던 외형적으로만 풍기문란의 금기였던 간통사건을 일으켰다고 어우동은 음성 박씨 가문에서 파문(派門)되어 박씨 성을 뺀 자신의 별명인 어우동(於宇同)으로 기록되었으며 일부 기록물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乙자를 ㄹ받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발음이 어ㄹ우동, 얼동에 가까운 발음했고 어우동의 뜻은 '같이 어울려 통하다'는 설과 '오래 오래 함께 잘 살다'는 뜻이 있다는 설들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어우동은 충청도 음성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랐는데 연산군일기에도 어우동을 '구마'라고 기록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요즘으로 치면 외교부 국장급인 정3품 숭문원 지사 박윤창이요. 어머니는 정귀덕, 오빠는 박성근 이다.
왕손인 태강수 이동과 혼인했는데 이동은 장안에서 이름난 독특한 난봉꾼으로 아버지 계양군 이증의 강한 만류도 뿌리치고 기생 연경비에게 빠져 집안에 기생을 측실로 들인채 신혼 첫날밤부터 아내 어우동을 사랑하지 않은채 연경비의 꼬임과 질투에 놀아나 어우동과 이혼할 속셈으로 아내 어우동이 집에 온 은장이와 바람이 났다고 관가에 모함을 했다.
임금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엄한 조사 결과 결국 무고로 밝혀져서 태강수의 직첩을 환수해 버리고 재결합하라는 어명을 내렸으나 태강수 이동은 왕명까지도 무시한채 어우동을 친정으로 내쫓았다.
소박을 맞고 어우동은 친정으로 돌아왔으나 출가외인이라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자 친정 오래비 박성근이 여동생 어우동을 불쌍히 여겨 한양 변방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주자 어우동과 여종은 삵바느질로 연명을 해 나갔다.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어우동은 지체높은 왕족과 양반들의 비단옷을 많이 지었고 이를 계기로 왕족 수산수 이기와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되어 경제적 도움을 받게 된 후 바느질을 접고 서로 사귀게 되어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어우동이 변심하여 젊고 건장한 사내 오종년과 연을 맺자 수산수 이기와 작별하게 되었고 여종과 함께 온 장안을 헌팅 장소로 여기고 달 밝은 밤이면 밤마실을 다녔다.
이리하여 어우동은 한양 뭇 남성들의 화제와 선망이 되어 사내들이 어우동의 주위에 찾아들어 본격적인 기녀로 나서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방산수를 비롯한 왕족들과 조정의 바람기 있는 자칭 풍류남아 벼슬아치들과 출신 신분을 가리지 않은 뭇 소년들까지 심문에서 밝힌 17명의 남성들과 거침없는 애정 행각을 벌렸다.
관가의 기찰이 시작되자 처벌이 두려워 겁을 먹은 간통했던 한 사내가 어우동과의 통정 사실을 승정원에 자진 신고해 어우동은 여종과 함께 의금부에 끌려가 굴욕적인 심문을 받아야 했다.
어우동의 애정 행각은 부풀릴대로 부풀려져 대동야승(大同野乘)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예쁜 소년을 끌어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 끌어 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 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누구는 나이가 젊고 누구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누구는 내가 맡고 누구는 네게 주리라" 하여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우동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까지 남겨졌던 것은 그녀와 정을 통한 남자들 중에 고관대작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친복친 6촌 사이인 같은 종중의 왕족들이 함께 어우동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났다.
양반 여성이 비록 이혼을 했다지만 왕가의 며느리가 왕족, 양반, 양인, 노비, 소년 등 17여 명의 사내들과 정을 통한 간통사건이라 파문이 컸다. 여종과 함께 놀아난 사내들까지 포함하면 백 여명에 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원래 왕실과 사대부의 체면 때문에 이 일을 그냥 덮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도승지 김계창이 격분하여 이런 사실을 덮으면 안 좋은 소문만 난다면서 강력하게 처벌을 건의했고 바람둥이 임금 성종 이혈 마저도 이 건의를 결국 수용해야 했다.
이에 성종 11년(1479년) 6월 13일, 의금부에 전지(傳旨)하기를, "방산수 이난을 잡아다, 태강수 이동이 버린 아내 박씨를 간통하였으니, 국문하라."고 하였다.
이틀 뒤, 6월 15일. 사건의 전모를 좌승지 김계창이 들어와 다시 고하니 임금 성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태강수 이동의 아내 박씨가 죄가 중한 것을 스스로 알고 도망하였다 하니, 끝까지 추포하라." 하였다.
김계창이 말하기를, "박씨가 처음에 은장이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고, 또 방산수와 간통하여 추한 소문이 일국에 들리었으며, 또 그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한 집안의 음풍(淫風)이 이와 같으니 마탕히 끝까지 추포하여 법에 따라 처치해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可)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우동은 간통죄가 아닌 강상죄로 처형되었는데 강상죄는 엄청나게 무거운 형벌로 원래는 가족 내의 패륜 범죄나 노비가 주인을 겁탈하거나 살해한 경우에만 적용하였다. 조선의 형벌인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처녀총각의 간통은 장 80대, 유부녀의 간통은 장 90대였다. 세상을 아무리 떠들썩하게 했다 해도 사건 그 자체는 간통이었기에 간통사건으로 처리하려 했으나 왕인 성종 이혈이 강상죄를 적용하라고 명령 하였으며 일부 신하들은 반대했지만 성종의 뜻이 워낙 완강하여 어우동은 유배를 가게 되었고 1년 뒤 1480년 10월 18일, 어우동과 그의 여종은 교형에 처해졌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성종이 폐비 윤씨사건으로 몹씨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어우동의 성스캔들 사건에 영향을 끼쳤던것 같다.
원래 강상죄는 참형(斬刑)을 적용했고 관련자를 연좌해 처벌 하는게 관례였는데 어우동과 그의 여종은 교형으로 끝났고 가족들은 연좌되지 않은 일관성 없는 형집행을 했다.
어우동은 '번좌'라는 이름의 딸을 한 명 남겼는데 이 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어우동의 딸 번좌에 대해서는 그 후의 기록은 없다.
어우동은 음탕한 기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어우동은 분명한 양반 가문 출신이며 직업적 기생이 아니었다. 어우동의 타고난 달란트와 여성으로서 존재 가치를 잘못 판단한 못난 남편 태강수 이동과의 이혼 송사 후 그녀의 운명이 백팔십도로 바뀐것이다.
즉 남편을 잘못 만나서 타락의 길로 빠져버린 셈이다.
20살에 시집을 와 십 수년을 청상과부처럼 외롭게 지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며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그가 거느린 여종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의 개념도 한 몫을 톡톡히 한것 같다.
문제는, 어우동과 놀아난 왕족들과 고관대작들은 어우동의 사형 이후 모두 복권되어 재등용 된점이다. 이들은 비록 왕명으로 재등용이 되었으나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소문을 견디지 못해 사직한 자들도 있었다 한다. 어지간히 뻔뻔스러운 인간이 아니라면 타인의 시선이나 수근거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유소는 이조 판서, 지중추부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성종 19년(1488년)에는 판중추부사 겸 정2품 군무 최고직인 도총관에 이르렀을 정도로 되려 더 출세를 했다. 그러나, 천벌을 받아서인지 1489년 돌연사로 56세로 사망했고 어우동과 놀아난 김세직은 형조 참판이 되어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며 정숙지는 손자인 정원준이 성종의 딸인 정순 옹주와 결혼하여 부마로서 봉성위에 봉해졌을 정도로 집안이 번성했고 출세했다.
또한 어우동이 죽은 지 4년 후 이사준(李師準)이라는 사람이 정9품 익위사 세마로 승진하려는데 어우동과 관련자니 승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상소도 올라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일부 야사에는 성종도 어우동과 성스캔들이 있는 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루머가 세간에 퍼진 이유는 어우동과 놀아난 사람 중에 이씨 성을 사용했던 선비가 있었는데 그 선비의 정체가 혹시 성종이 아니겠느냐는 세간의 추측 때문이었다 한다.
어우동의 성스캔들은 성종에게 있어서도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당시에는 신흥 사림 집단과 기성 훈구파가 맞서 자기 세력들을 키우려 했는데 사림파의 중심 인물들과 신인 유망주들이 어우동 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김칭, 김세적, 김휘, 정숙지 등은 성종의 총애를 받고 한창 성장한 세력이었고 이승언도 종친의 사위로 성종이 눈 여겨 아꼈던 유망주였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어우동의 성스캔들로 인해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또한 왕족의 아내인 여인이 겁도 없이 시가(媤家) 친척인 여러 왕족들과 관계를 맺었으니,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의 위상도 크게 흔들렸고 성종은 괘씸죄를 적용해 간통죄가 아닌, 강상죄를 적용해 사형 시켰던것 같다.
어우동의 어머니 정귀덕은 성격이 몹시 포악한 악처(惡妻)로 유몀했다. 어우동의 아버지이자 정귀덕의 남편인 박윤창은 한 쪽 눈이 없는 장애인이었는데 정귀덕은 남편인 박윤창을 노비처럼 부리며 폭행하거나 모욕했으며, 남편 박윤창의 외모에 싫증이 나 하인들과 터놓고 간통을 저지르며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정귀덕에 대한 일화가 전하는데, 정귀덕은 집안 공사 를 하면서 창문을 어느쪽에 내는지에 대한 남편과 의견 차이로 몽둥이를 들고 집안 가구들을 때려부수며 "애꾸눈 놈아, 애꾸눈 놈아, 네가 일을 아느냐?"며 남편 박윤창을 모욕했다.' 한다.
어우동이 처형당하고 8년이 지난 1488년, 어우동의 아버지 박윤창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정귀덕과 오빠 박성근이 남았는데, 큰 사건이 또 터졌다. 아들 박성근이 어머니 정귀덕을 살해하는 패륜 범죄 강상죄를 저지른 것이다. 박성근은 어렸을 때 "어미가 잠을 자는데 발이 4개였다."라는 말을 주변 사람에게 했다가 어머니 정귀덕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다.
어머니 정귀덕은 평소에도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 박윤창을 자주 구타하는 등 포악한 모습을 보였으며 밤이 되면 아들을 상자 안에 넣어 주며 학대 했고 의붓아들보다 재산도 적게 상속하였다.
어머니 정귀덕이 딸인 어우동의 음란한 행동을 비호해 가문이 피폐 했다는 불만까지 더해져 어머니 정귀덕을 심하게 원망했던 박성근이 외사촌과 모의하여 종들에게 어머니를 죽이도록 사주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어우동의 딸 번좌가 관청에 고발했고, 발각되어 구속된 박성근은 강상죄로 처형될 운명이었으나 최종 판결이 나기 전에 옥사(獄死)하였다. 가족들도 연좌되었으나 노비로 전락하는 건 면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변방으로 쫓겨 났다.
어우동과 함께 놀아난 왕족들이 무려 4명이나 연루되었다.
왜 그처럼 왕족들의 사생활이 문란 했을까?
조선시대에는 왕족으로 태어나면 국법에 의해 3대가 지나지 않으면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왕족이라고 나라에서 내리는 수 백결의 토지와 저택으로 하는 일이란 오로지 투전 등 잡기(雜技)와 기생집을 드나들거나 유부녀들을 희롱하는 계집질이 전부였다.
심지어는 왕의 여자인 궁녀들까지 희롱하는 일도 빈번해 물의를 일으킨 사례도 있었다.
왕족으로 태어나면 선원록과 유부록의 왕실족보에 올라 철저하게 관리되었으며 해당 관청은 종친부 였다.
종친부(宗親府)는 조선 시대 국왕을 지낸 이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의 친척인 왕가, 종실, 제군(諸君)들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했던 관아였다.
종실들의 봉작승습, 관혼상제 등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고려 때 제군부를 조선 전기에는 재내제군소(在內諸君府)라 하였으나 여러 차례 그 명칭과 기능이 바뀌었다가, 세종 12년(1430)부터 종친부라 명하였다.
종친부는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 맞은 편에 위치했다.
왕족들의 품계가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데
조선 왕족들의 품계는
대군(大君)은 정1품,
군(君)은 정2품,
도정(都正)은 정3품,
수(守)는 정4품,
영(令)은 정5품,
감(監)은 정6품을 내렸으며
대군들의 후손은 4대손까지,
군들의 후손은 3대손까지 왕족으로 인정했으며 대군이 낳은 서얼자식들은 왕족으로 인정했으나 군이 낳은 서얼자식들은 인정치 않았다.
임금의 사위인 공주나 옹주의 남편에게도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위호(位號)를 내려. 사위를 종친처럼 봉군하여 의빈부(儀賓府)에서 관리했다.
왕비가 낳은 공주에게 장가든 자는 종1품의 도위를, 후궁이 낳은 옹주에게 장가든 자는 종2품의 위를 제수하였으며, 종친으로 대접했다.
성종은 왕족들이 학문을 멀리하고 제 멋대로 놀아나 궁리끝에 궁궐에 종학(宗學)을 세워 왕실 자녀들의 교학에 힘을 썼으나 큰 효력이 없었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