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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시민단체와 힘을 합칠 이유가 전혀 없고, 정치권에 이 문제를 갖다 바칠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게 본질적으로 사임당한 배경이다. 사임 당한 이후 특정 시민단체와 정치권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서이초등학교 교사 자살사건도 그렇다. 교육계 내에서 장말 실력이 있는 세력이 주체적으로 해당 법률문제에 대하여 1차적으로 해결을 시도해야 하는데, 정치권과 손을 잡고 해결하려는 순간 다른 당에서 당연히 반발을 하고 교육문제가 『정치 쟁점화』 되고 말고 그럼 정작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이름을 드러내는 자들은 따로 있게 된다.
칼럼을 써 보았다. 공자 사후 증삼이라는 자(증자)가 그의 스승의 학문을 정치화하여 조선이 망하고 나서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외면하고 있는 꼰대의 표상이 되어버린 『유교(儒敎)』 가 아닌 공자의 『유학(儒學)』의 참 맛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故 채상병 사망 사건의 핵심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싶었다.
#1. 『학문의 정치화』는 지식인의 「부와 명성」의 욕심때문이다
학문(學問)은 배우고(學) 묻는(問) 순수한 활동이다. 이는 인간의 지식과 이해를 체계화하고 확장하기 위한 탐구와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학문을 통해 얻은 성과를 원칙적으로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보다는, 바로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변용(變容)하여 부와 명성을 일거에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우리는 권력에 영합하여 줏대없이 하는 짓이라는 의미의 『어용(御用)』이라고 한다.
특히 대스승이 이루어 놓은 학문(學問)을 그 스승 사후(死後), 그 말씀마저 강조점을 왜곡하여 당시 왕을 위한 통치 수단으로 전락시켜 놓으면 그 학문(學問)은 더 이상 학문(學問)이 아닌 것이다.
그 권력자가 죽고나면 그 어용이론은 사람들에게서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학(儒學)』과 『유교(儒敎)』의 문제라는 어느 대철학자의 말씀에 귀기울여 본다.
#2. 공자의 『유학(儒學)』을 누가 꼰대의 『유교(儒敎)』로 만들었는가
가. 「나는 미천한 신분이었다.」 “吾少也賤(오소야천)”
공자의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말씀이다. 공자는 자신을 이르러 자신있게 “나는(吾) 어렸을때(少) 미천한 사람이었다(賤).”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을 정직하게 한 이유가 뭘까?
바로 호학(好學)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 일 것이다. 어려서는 미천했으나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志學), 평생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이 배우기는 자신이 가장 잘 한다고 강조하셨다.
「불여구지호학(不如丘之好學)」
『논어 공야장편』
여기서 구(丘)는 공자의 이름으로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결국 공자는 태어나기는 미천한 신분(賤)이었지만, 평생 배우기를 좋아하여(好學) 많은 제자와 함께 그 위치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 말씀으로 보인다.
나. 공자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인(仁)』
이『인(仁)』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 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친구같은 자로가 있다. 자로가 공자에게 “한마디로 평생 실천할 만한 덕목이 있습니까?” 묻자, 공자가 바로,「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서호, 기소불욕, 물시어인)」『논어 위령공편』이 뜻풀이는 “바로 서(恕)이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는 의미이다.
이 당시 서(恕)는 같을 여(如)에 마음 심(心)으로 “너의 마음과 마의 마음이 같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 지금의 용서가 직접적인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하게 하는 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하게 하는 것”, 이것은 현실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지휘관과 부하 간에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공자는 자식과 부하를 위하는 척하며 강요하지 않는 것이『恕』이고 『평생 실천할 만한 덕목』이며, 이것이 『인(仁)』의 핵심이라고 한 것이다. 결국 공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민한 감각(仁)』을 강조하셨다.
다. 증삼(증자)이의 『학문의 정치화』 그리고 공자의 유학의 『왜곡』
증삼(증자)이는 공자 70대 때 받아들인 20대 젊은 제자였고, 공자 사후 공자 학당을 이끌어 간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에 귀기울여 보면,효경(孝經)이라는 동양고전이 있다. 동양고전 13경(經) 중에서 처음부터 책 이름에 ‘경(經)’ 자를 붙인 것으로는 유일한 책이라고 한다. 그 만큼 국가적으로 강조한 책이고, 국가적으로 장려한 책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효에 관한 공자와 증자의 대화가 주된 내용인 효경(孝經)의 저자가 증자이거나 증자의 제자이거나 이런 논란 보다는 효경(孝經)에서 강조한 효는 ① 부모에 대한 사랑과 공경, ② 부모의 뜻을 받들어 행하기, ③ 부모의 봉양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네이버 클로바 X 참조).
우리가 흔히 접했고, 상식으로 생각하는 효(孝)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효(孝)의 주체가 자식이다. 효(孝)는 자식이 부모를 향한 덕목이고, 이는 충(忠)과 함께 상하질서를 강조하고 싶었던 당시 중국의 한대에서 왕들이 적극 수용하고 장려하게 되었다.
그 댓가로 공자의 적통을 홍보한 증자 학당은 신성시되고 재정적으로 막대한 지원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증자가 기억한 공자의 말씀이 과연 맞을까? 아니면 공자의 학당을 이어 받아 꾸려가면서 중국 한대 왕조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공자의 말씀을 왜곡한 것일까?
공자는 분명히 “나는 미천하였다” 그러나 “나는 배우기를 다른 사람보다 가장 좋아하였다.”고 하여 순수하게 학문으로써 가르침인 유학(儒學)을 강조하셨는데, 그의 제자 중에 증삼(증자)이가 공자의 교육을, 상하질서를 강조하여 결국은 왕을 칭송하게 만드는 학문을 『국가 운영의 이념화』, 『학문의 정치화』인 유교(儒敎)로 왜곡한 것은 아닐까?
그때나 지금이나 지식인은 육체 노동을 하지 않으며서 풍족한 생계와 명성을 이어가고 싶다면, 가장 손쉬운 방법이 돈 많고 권력 있는 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팔아먹으며 살아가야 하는 꼴은 같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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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공자의 효(孝)는 실제 강조점이 무엇인가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문효, 자왈: "부모유기질지우.")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씀이다. 맹무백5)이 효(孝)를 물었을 때, 공자의 답은 "부모는 오직 자식이 아픈 것을 걱정한다“ 였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 보자.
공자의 효(孝)에서 주어는 자식이 아니고 부모(父母)이다. 그 효(孝)의 대상과 내용은 효경에서 말하는 ①부모에 대한 사랑과 공경, ②부모의 뜻을 받들어 행하기, ③부모의 봉양과 같은 내용이 아니라, ” 단지 자식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효(孝)라고 강조하셨다.
공자는《부모가 자식이 아프지 않고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효(孝)라고 일갈하신 것이다. 이는 공자가 강조한 인(仁)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민한 감각이라고 강조하여,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공자는 한때 노나라 법무부장관을 잠시 하였으나, 노나라 대부 계씨가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공자를 탐탁치 않게 여기다 마침내 당시 왕을 구슬려 억지로 쫓아 냈으며, 이후 공자는 55세때부터 68세까지 단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나라를 찾아 대부자리라도 얻어 보려고 13년 정도 천하를 주유하였으나, 가는 곳 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의심한 기득권의 극렬한 반대로 이마저도 실패하여, 결국 13년의 고행을 마치고 자신의 고향 노나라 곡부로 돌아와 5년간 공자의 학당에서 제자를 길러내고 돌아가셨다.
이런 공자의 삶의 행적을 보면, 공자가 왕의 지지를 받거나, 왕을 위해 왕조의 질서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줄 이론을 만들 이유도, 그런 주장을 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왕과 대부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가 더 컸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인(仁)을 강조하여 상하질서보다는 그 누구든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강조하여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고 하셨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효(孝)도 부모와 자식 간에 상하질서를 규정하기 위함이라고 보다는 부모가 아직 어리고 미숙한 자식에 대하여 예민한 감각으로 돌보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참유학의 맛이다.
이것을 공자 사후 증삼(증자)이라는 자가 왕들에게 항상 막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 위하여 공자의 이 순수한 학문을 상하질서를 강조하는 왕국통치이념으로 교묘하게 팔아 먹은 어용 학자라는 의견에 필자는 동조한다.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 조선이고, 조선은 공자의 오리지널한 유학의 맛을 맛보기도 전에 어용인 증삼이의 상하질서를 강조하는꼰대의 유
교(儒敎)를 받아들여 통치하였고, 그 결과 허접하고 못난 왕이 나와도 신하들은 앞에서는 왕이시여 하며 받드는 척하며, 뒤에서는 나라 곳간에서 쥐새끼처럼 빼먹었다.
맹자한테 걸렸다면 단번에 목을 내놓아라 했을 왕들이 조선에서는 공자를 빙자한 증삼이 덕분에 왕 노릇을 소꼽장난처럼 잘 해 먹었다.
#3. 공자의 『효(孝)』와 故 채상병 사건의 핵심
가. 공자가 강조한 효(孝)와 충(忠)의 진정한 의미
공자의 효(孝)에서 주어는 「자식」이 아니고 부모(父母)이고, 그 효(孝)의 대상과 내용은 ”단지 자식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 효라고 강조하셨다. 즉, 공자는《부모가 자식이 아프지 않고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효(孝)라고 일갈하신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에 예민한 감각(仁)은 부모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효(孝)의 핵심이었다. 이것을 증삼이가 부와 명성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스승의 말씀을 거꾸로 왜곡한 것이다.
여기서 이런 공자의 귀한 말씀을 군에서 흔히 사용하는 『충(忠)』에 확대해 보자. 우리가 아는 충(忠)은 주체가 부하다. 그 대상과 내용은 ”지휘관 또는 상관에게, 그의 명령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 정도로 대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충(忠)은 직속상관에서 그 위 상관에게 확대되면 결국 참모총장 및 국방부 장관 그리고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충(忠)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충(忠)이다. 증삼(증자)이의 영향을 아니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리지널한 공자의 말씀에 귀기울여 보면, 공자는 충(忠)은 주어가 부하가 아니고 지휘관 또는 상관이고, 그 충(忠)의 대상과 내용은 ”단지 부하가 임무수행하다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충(忠)이라고 강조하셨을 것이다.
나. 故 채상병 사망사건의 핵심
공자의 말씀에 따르면, 사단장의 충(忠)은 ”단지 부하가 강물에서 실종자수색작전을 하다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어야 했고, 해병1사단장이 강조한 대로 현장에 나와 있는 기자들의 촬영 화면에, ”부하들이 해병대 옷을 전원 입고, 일사분란 수색하여 그 모습이 전국민에게 나가도록 노력하라는 명령을 성실하게 이행하는것“이 충(忠)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진정한 충(忠)이 부족했던 사단장의 욕심이 故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지휘관이 하고 싶은 것을 부하에게 하게 하는 것”, 이것은 현실에서 지휘관
과 부하 간에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공자는 부대를 위하는 척, 부하를 위하는 척하며 실은 《자신을 위한 짓》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평생 실천할 만한 덕목』이며, 이것이 『인(仁)』의 핵심이라고 한 것이다.
[약력]
육군대학 법무실장
군사법 교관
합동군사대학교 법무실장
국방부 외부 인권교수
합동군사대학교 명예교수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