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바둑이라도 두어라 - 공자

칼럼
장기 바둑이라도 두어라 - 공자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 입력 : 2023. 09.14(목) 11:00
  • 영암일보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강성률
공자의 고향은 산둥성 취푸(곡부)시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노나라의 수도였으며 맹자와 노반(중국공예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딸만 아홉을 낳은 후, 64세가 넘어 젊은 안징재에게서 공자를 얻었다. 숙량흘은 키가 열 척이나 되고 힘이 장사였는데, 그의 무용담 가운데에는 위로부터 내리 닫히는 성문(城門)을 두 손으로 떠받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자가 세 살 때 부친이 돌아가시니,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아들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물론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공자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스스로 “십여 호 밖에 안 되는 마을에도 나만큼 성실한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 향학심(向學心)만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공자는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당당하였고, 키도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다. 그의 용모에 대해서 이런 기록이 있다. “공자의 눈은 크고 길며 이마는 앞으로 높게 나와 있으며, 팔은 길고 등은 거북의 모양이며 키는 매우 크다.”공자는 자기의 집을 서당으로 삼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젊었을 때부터 시작한 이 교육활동으로 인해 3천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한 이는 그의 명성을 멀리 퍼져나가게 했다. 물론 공자에게도 명예욕이 없진 않았으되, 주어지는 벼슬자리가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일치하지 않았던 관계로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만다.

그리하여 마침내 합당한 자리라 여겨 받아들인 고향의 관리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쉰 살이었다. 쉰 네 살에 공자는 재상(宰相)의 권세를 겸하게 되었는데, 그때 난신(亂臣)인 대부 소정묘를 사형에 처하여 그의 시체를 3일 동안이나 백성들 앞에 구경시켰다. 그가 실권을 잡은 지 3개월 만에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혔던 바,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고, 길에 떨어진 남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공자는 쉰여섯 살에 모국인 노나라를 떠나 약 14년 동안 (중국 안의) 다른 나라를 방랑했다. 그의 방랑 여정은 불행하고도 초라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몇 차례나 수난을 겪어야 했다. 공자는 덕 있는 임금을 만나 천하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끝내 그의 포부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대신 현실정치에서와 달리, 교육과 학문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교육방법은 스스로의 말과 몸가짐 하나하나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일종의 시범식 교육이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선생을 모시고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공자는 일하지 않는 인간,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인간을 가장 싫어했다. 그리하여 “내가 하루 종일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너희는 정 할 일이 없거든 멍청하게 잡담이나 하지 말고, 장기 바둑이라도 두어라.”고 충고한다.

제자들의 비통 속에 세상을 떠났을 때, 공자의 나이는 일흔 셋이었다. 장례의식은 제왕의 장례식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으며, 시신은 노나라 서울 곡부의 사수(泗水)가에 묻혔다.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3년 동안 산소 곁에 여막을 지어서 거처하였고, 자공이란 제자는 6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 후 그곳에 1백여 호의 가족이 모여 살았으므로, 동네 이름을 공리(孔里)라 불렀다.

공자가 살던 집에는 그가 생전에 쓰던 옷, 관(冠), 거문고, 수레, 책들을 비치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공묘이다. 공자(기원전 552년-479년)는 죽은 후 성인(聖人)으로 추앙되었고, 그 명예는 2천 년이나 계속 누려져 왔다. 그의 사원이 곳곳에 세워졌고, 12세기 초에는 신으로까지 추대되었다.‘인간’이기를 원했으며 스스로 성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그가 신격화되고 만 것이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