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 - 상앙

칼럼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 - 상앙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 입력 : 2024. 02.08(목) 11:46
  • 영암일보
<사진=강성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어느 날 상앙은 중국 진(秦)나라 수도(서울)의 남문에 석자 길이의 장대를 세우고는 “누구든지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황금 열 덩어리를 상으로 주겠노라!”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를 수상쩍게 여긴 백성들은 아무도 옮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상앙은 상금을 황금 오십 덩어리로 올렸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어떤 사람이 용기를 내어 장대를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석에서 황금 오십 덩어리를 상으로 주었다.

상앙의 본래 이름은 공손앙(公孫鞅, 기원전 390~338년)으로서 위나라 왕의 첩에게서 태어났으며, 그가 나중에 진나라에 등용되어 상(商)이라는 땅을 봉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이후 상앙(商鞅)이라 불리게 되었다.

진나라 효공(孝公)에 의해 등용된 상앙은 법의 엄정한 집행을 위해 엄벌주의와 연좌제(連坐制, 죄인의 죄를 가족·친지들에게까지 묻는 제도), 밀고(密告)의 장려, 신상필벌(信賞必罰,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죄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것) 등을 시행하였다.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법률의 구속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공표하기 전에 준법에 대한 정부의 굳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위와 같은 일종의 이벤트를 선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태자(太子)가 법률을 위반하였다. 태자는 임금의 뒤를 이을 사람인지라, 관례상 벌을 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상앙은 태자를 대신하여 그의 후견인인 태부(太傅) 공자 건(公子 虔)을 처벌하고 또 그의 스승인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이마에 먹줄로 죄명을 써넣는 묵형(墨刑)을 내리니, 이로부터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법령에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태자를 대신하여 벌을 받았던 공자 건이 다시 법을 어기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코를 베어내는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이가 바로 진나라의 제 26대 군주 혜왕(惠王)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공자 건과 그 무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관직에서 물러난 상앙이 상읍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행렬이 제후에 못지않았다.

이러한 상앙의 권세에 위협을 느낀 혜왕은 이 기회에 그를 아예 제거하기로 맘먹고 체포령을 내렸다.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상앙은 급히 도망가다가 국경 근처의 한 여관에서 하룻밤 머물기를 청하였다.

여관의 관리들은 그가 상앙임을 알지 못하고, “상앙의 법률에 여행권이 없는 자를 유숙케 하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라면서 거절하였다. 이 말을 들은 상앙은 속으로 ‘아, 내가 만든 법률의 폐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몰랐구나!’라며 탄식하였다.

상앙은 그 길로 위나라에 갔다. 그러나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추방하되 다른 곳으로 고이 보내면 진나라의 보복이 있을까봐 그를 다시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상앙은 살아남기 위해 일단 자신의 영지였던 상(商) 땅으로 가 군대를 모았다. 하지만 강대한 진나라 군대와 맞설 자신이 없어 일단 약소국이었던 정나라를 공격해 영토와 인력, 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진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상앙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혜왕은 상앙을 ‘두 대의 우마차에 나누어 묶어 놓고 각각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아 몸을 찢어 죽이는’, 이른바 차열(車裂)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로 처형하고는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돌려보였다.

또 상앙의 가족까지 모두 몰살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상앙에 대하여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라고 희롱하였다.

한편, 진나라는 상앙이 쌓아올린 부국강병의 기반 위에서 더욱 강성해졌다.
상앙은 비록 비참하게 죽었으나 그가 정비한 법과 제도는 결국 후일에 진나라의 시황제로 하여금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수립하게 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