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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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기대
군서문인의 이야기
  • 입력 : 2024. 03.28(목) 11:08
  • 영암일보
<사진=박석구 문인>
내 몸에는 두 개의 점이 있었다.
하나는 오른쪽 사타구니에서 무릎 쪽으로 10Cm 정도 떨어진 안쪽 깊숙한 곳에, 하나는 코의 오른쪽 바로 밑 가까이에.

사타구니에 있는 점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에 어쩌다 나만이 바라보고 마는 정도였지만, 오른쪽 콧구멍 옆에 있는 점은 어릴 적부터 ‘눈물받이’여서 살아가는데 고생이 많을 것이란 말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살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회의 한가운데서 그렇게 고생하고 부대끼면서 지금까지 몸부림을 쳤건만, 지금 내가 모아놓은 재산은 부모님이 돌아가면서 물려준 한적한 시골집과 땅 이외는 그리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그 집에 내려가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멀쩡한 사람도 누구나 한 두가지 이런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보이는 것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그것이 없었으면, 아니 고쳐졌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서 말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일어나는 삶의 어려움을 그것에 전가시키는 경우도 많다.
가령 당신이 유년시절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했는데 꼴찌로 들어왔다고 치자.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 달리기를 잘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달리기를 못하는데’ 하면서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놓은 달리기 시합이 있다고 해도 ‘나는 되지 않을 거야.’ 하며 참가를 포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고 보아야 한다.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절망도 할 수 없다.’ 라는 명언을 남긴 ‘조지 버나드 쇼’도 소년시절엔 사람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부끄러움과 수줍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여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고 수많은 명언과 해학적인 말을 남겼다.
그리하여 나는 ‘버나드 쇼’의 이미지와 걸맞지는 앉지만 항상 내 가슴에 멍처럼 각인이 되어있는 ‘눈물받이’라는 점을 빼기로 했다.
그것도 인생의 한 갑자가 가까이 온 나이에. 말이 성형외과지 여성들의 부끄러운 부분의 수술과 레이저로 점이나 빼는 후배 병원을 찾아가, 사실은 눈물받이 점을 빼려는 속셈이었지만 ‘젊어지고 싶은 욕망’이라며 얼굴의 모든 점을 빼줄 것을 부탁했다.

얼굴의 온갖 잡티나 검버섯, 희미한 점이나 빼고 싶은 점까지 레이저로 제거하고 나니 내 얼굴에 그렇게 많은 검은 것들이 박혀 있다고 상상할 수 없었지만 30군데가 넘었다.
하지만 예의 눈물받이 점은 너무도 살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 결국 세 번의 수술 끝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자세히 보면 아직도 희미하게 점의 모습이 남아 있다.

나의 그 어리석은 관념이 살아 온 내내 깊게 자리를 잡았던 것일까?
이상하게도 세 번의 점 제거 수술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사실은 이렇게 별로 변함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 점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이전보다 안정된 삶으로 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모처럼 행복했고 가슴 속에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그 후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내 삶을 항상 긍정적으로 보고 아는 이들에게 되도록 칭찬을 하면서 살갑게 굴며 살고 있다.

예전, 초콜릿으로 케이크 장식용 장미를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하는 회사에 다닌 적이 있었다.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많은 인원이 필요했는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자애들이 대부분이었다.
초콜릿에 물엿을 첨가해 롤러로 여러 번 밀어 얇게 편 다음, 크고 작은 동그란 틀로 찍어 그것을 하나씩 붙여가며 장미꽃처럼 예쁘게 만들어내는 제품이었는데, 완성된 제품이 되려면 상당한 시일의 교육이 필요했다.
하루 8시간의 교육은 오후가 되면 반복된 연습으로 인해 직원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지치게 했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 해찰을 하는 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가벼운 말을 붙여가며 친근감을 보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자란 아이가 나를 불렀다.

“대리님, 뒷골이 땅기면서 머리가 아파요.”

“다른 곳은 괜찮고?”

“네, 대리님이 이마를 집어주면 나을 것도 같은데요?”

“알았어.”

나는 순자의 이마를 가볍게 탁 때리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실 그때 난 결혼 전이고 서른이 채 안 되었기에 짓궂은 말과 행동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애들이 꽤 있었다.
약품함을 뒤졌지만 그날따라 진통제가 보이지 않았다.
애들이 머리가 아프다는 것은 생리중이라는 것을 몇 번의 대화에서 파악은 했지만 어떤 애들은 ‘저 생리해요. 약 좀 주세요.’ 하며 당돌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대밖에 없는 회사차는 소장이 일 때문에 몰고 나가서 약국까지 걸어가기에는 회사와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약을 주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나뭇잎에 싸 두면 다음 날 잎을 뚫어버린다는 소화제 두 알을 호주머니에 넣고 교육장으로 갔다.

“여기 있다. 금방 나을 거야.”

고맙다는 순자의 인사를 뒤로 하고 나는 다른 애들이 만들고 있는 초콜릿 장미 모양을 손질해 주다가 30분 후 다시 순자에게 다가갔다.

“어때? 좀 나아진 것 같니?”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네, 머리는 이제 개운한데 배가 살살 아파요. 대리님이 살짝 문질러 주면 나을 것도 같은데요?”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