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 모두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난 데다 모친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주렴계와 소강절과 같은 뛰어난 유학자들로부터 좋은 영향도 함께 받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형과 동생의 기질과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형 명도를 만나본 사람은 항상 그에게서 온화한 기운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생 이천은 이와 다르다. 어느 겨울밤 이천이 눈을 감고 앉아서 정신을 수양하고 있었다. 이때 제자 둘이 그 모습을 보고 감히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올리지 못했다. 그들이 옆에 서서 기다린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천은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아직도 두 제자가 공손히 서 있는 것을 본 이천이 “밤이 깊었으니 이제 돌아가거라.”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두 제자가 물러가니, 이미 문 앞에는 하얀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학생들은 모두 이천보다는 명도를 가까이 하였다.
이천은 정치활동에 뛰어들기 전에 천자(중국 황제)의 스승이 되어 도학을 가르쳤다. 그런데 한 번은 철종(송나라의 제7대 황제, 재위 1085~1100년)가 무심코 버들가지 하나를 꺾었다. 이천이 이것을 보고 정색하여 말하기를 “따뜻한 봄날은 초목들이 싹을 틔우는 계절이온데, 아무 까닭 없이 가지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 철종이 매우 무색해졌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와 반대로 명도에게서는 항상 다사로운 기운이 풍기었다. 그래서 신종(神宗, 송나라의 제6대 황제)이 명도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점심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리고 작별할 때는 다시 분부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도 좋소. 나는 그대와 이야기 나누는 것이 즐겁소.”라고 하였다.
대개 사람의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한다. 형 명도는 타고난 성품이 원만하고 화평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 이천은 타고난 그의 성격 탓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았다. 벼슬살이할 때에도 변두리 지방에서 몇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다가 휘종(송나라의 제8대 황제)에 의하여 다시 불려 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이때는 당쟁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기인지라 들어가자마자 또 참소를 당했다.
그가 학생들을 가르친 것에 대해서마저 반대파 사람들은 “이천이 사설(邪說-그릇되고 간사한 말)로써 백성들을 현혹시킨다.”고 엉뚱하게 무고하였다. 더욱이 사태가 악화하여 여러 곳에서 제자들이 체포당하는 등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천은 남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해야만 했다. “이제 반드시 내게 와서 배울 필요는 없고, 너희들 스스로 힘써 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그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지켜본 사람은 겨우 네 사람뿐이었다. 또한 장례식 후로도 감히 그의 묘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마저 없었다고 한다.
정이천(程伊川, 1033년-1107년)은 중국 송나라 도학(道學)의 대표자로서 보통 ‘이천 선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든 사물의 변천은 기(氣)의 변화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기가 변하는 것은 불변의 이(理)에 근거하기 때문이라 주장하였고, 이(理)를 추구하는 것, 즉 궁리(窮理)를 강조하였다. 명도, 이천 두 형제의 학설은 후에 주희(주자)에게 계승, 발전되어 정주학파(程朱學派)라 불리게 되었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