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와 호랑이

칼럼
매와 호랑이
조는 듯 앉고 병든 듯 걷다
  • 입력 : 2024. 11.01(금) 09:09
  • 영암일보
▲김백호 영암일보 대표이사/법학박사
채근담(菜根譚)에 "鷹立如睡(응립여수) 虎行似病(호행사병)"이란 글귀가 있다.
'매는 조는 듯 앉아 있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걷는다'라는 뜻이다. 겉으로 보일 때는 그냥 조는 듯 병든 듯 사냥감이 긴장하지 않도록 힘을 빼는 척하나 의식은 총총히 깨어 있어 사냥감을 발견하는 순간 숨겼던 발톱을 꺼내 잽싸게 낚아챈다.
매는 매요, 호랑이는 호랑이다. 모습이 초라하다 가벼이 보지 말고 화내지 않는다고 얕잡아 보지 말고 겸손 하라는 교훈이 아닌가 싶다.
만일 매가 예리한 눈초리를 번득이고, 호랑이가 몸에 힘을 주어 걸으면 항상 이들을 경계해야 할 노루나 사슴 등 약자 동물들은 생과 사를 가르는 위험이 자신들에게 닥칠 것이라는 기미(幾微)로 알고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옛말에 '노루는 자기가 뀐 방귀 소리에 놀라 십 리를 도망간다'는 말이 있다. 겁 많은 노루를 빗대 지레 겁먹을 때 쓰는 말이지만 호랑이의 먹잇감인 노루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그림자처럼 덮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호랑이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무슨 소리가 났는데도 방관 한다면 살아남기 어렵기에 자기가 뀐 방귀 소리에라도 일단 안전한 거리까지 피하는 것이 본능이었을 것이다.
바보짓 같은 노루의 조심성에 호랑이의 삶은 힘들고 피곤해짐은 당연하다.
이에 천하의 호랑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무척 의뭉한 계략을 쓴다.
병든 듯 힘을 쭉 빼고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먹잇감들이 경계심을 풀 때 쉽게 사냥을 하는 것이다.
눈 속에 칼날 같은 예리함을 감추고 온몸에 힘을 쭉 빼고 사냥감들에게 관심 없는 듯 제스처를 보이면서 말이다.
천하의 호랑이답지 않아야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묘한 역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호랑이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에 힘을 빼고 어슬렁거리다가 상황을 내 편으로 만들어 놓고 시작할 줄 알고 또한 절호의 기회를 만들 줄 아는 노련함이 있는 것이다.
이런 노회(老獪)한 호랑이와 달리 초보 호랑이는 밀림의 제왕답게 힘을 잔뜩 주고 다닌다. 하지만, 이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은 힘들어질 뿐 아니라 경쟁자도 사냥감도 사라진다.
내가 호랑이고 배가 고프니까 무조건 먹잇감을 쫓는 건 시간 낭비고 굶어 죽는 지름길이다.
사냥감들 또한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또한 생존해 온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학습을 통해 익힌 실력이 있어 호락호락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실제 호랑이의 사냥 성공률은 10% 정도로 열 번을 쫓아가면 한 번 성공하는 것이 이를 반증 한다.
우리 주변에는 깊은 숲속에 몸을 숨기고 똑바로 걸으며 포효(咆哮)를 아끼는 진짜 호랑이들이 많다.
반면 사방팔방을 누비며 비린내를 탐하는 호랑이 닮은 고양이들도 많으며, 자기 방귀 소리에 놀라 10리를 냅다 도망치는 노루 같은 호랑이들도 많은 것 같다.
그리고 힘을 뺄 줄 아는 호랑이 같은 사람도 있고, 호랑이 답게 힘주고 다니는 이들도 있다.
누가 누가 더 잘 하고 있는지는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