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골에 괸 물 맛-원효

칼럼
해골에 괸 물 맛-원효
재미있는 철학이야기(제43화)
  • 입력 : 2024. 12.20(금) 10:48
  • 영암일보
▲강성률 철학박사
원효의 아버지는 신라의 하급 관리였는데, 불행하게도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원효는 ‘사람은 왜 죽을까?,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하는 철학적인 사색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는 가운데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느끼고서 생로병사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화랑이 되어 백제와의 전투에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동료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하게 만든 중요한 이유였다고 알려져 있다.

서기 650년, 서른세 살이 되던 해 원효는 같은 집안 사람인 의상대사와 함께 길을 떠났다. 불교의 교리를 더 깊이 알고 또 행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에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나라를 바로 코앞에 둔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의 순찰대에 붙잡혀 스파이 혐의로 심문을 받고, 얼마 후 풀려나서 귀국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신라가 백제를 합병한 다음해인 661년, 이번에는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 의상과 함께 서해안의 당주(지금의 경기도 남양 부근)에 도착했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무역선을 기다리다가 해가 저물었다. 두 사람은 하룻밤 지낼 곳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매다가 빈 초막을 발견하고 그곳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몹시 목이 말라 잠을 깬 원효는 주위를 더듬거리다가 무슨 그릇에 물이 있음을 감지하고 그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한참만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그가 잠들었던 곳은 초막이 아니라 무덤이었으며, 맛있게 먹었던 물은 해골에 괴인 썩은 물이었다. 이를 알아채자마자 오장육부가 뒤집혀 뱃속에 든 것을 죄다 토해내고 말았다. 이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오직 마음 하나’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이제 구태여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고 되돌아왔다.

그 뒤로 원효는 좋고 나쁨, 길고 짧음, 너와 나를 초월하였고, 어떤 계율이나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경주로 돌아온 원효는 엄한 계율에서 벗어나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 ‘파계승(계율을 깨뜨린 승려)’이라고 하는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이에 대해, 그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속된 것과 참된 것 역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맞섰다. 어쨌든 그의 법회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잘 생긴 데다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설법의 내용 또한 감동적이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도끼에 자루를 낄 자가 없느냐? 내가 하늘을 받칠 큰 기둥을 깎아보련다!”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는데, 이 노래를 전해 들은 태종 무열왕(신라의 제29대 왕, 김춘추)이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은 모양이구나!’ 생각하였다. 그리고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게 하였다. 관리들이 때마침 문천 다리를 건너는 원효를 발견하였다. 이때 모든 것을 눈치 챈 원효는 일부러 다리에서 뛰어 내렸다. 흠뻑 젖은 원효는 관리들의 안내를 받아 과부인 왕의 둘째딸 요석공주의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옷을 말린다는 명분으로 발가벗은 채 공주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고, 이후 파계하고 말았다. 얼마 후 요석 공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문장가로 손꼽히는 인물,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설총이었다.(이 다음에 원효 제 2편이 이어집니다. 유튜브 ‘강성률철학티비’를 개설하였사오니 많은 시청 바랍니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