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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길로 들어섰다. 개를 동반한 하산 발자국을 뒤로, 경계를 넘어간다. 왕대밭이 보인다. 소나무와 한창 키 재기를 하는데도 이용하는 손길이 없었는지, 생을 다한 것들이 많다. 그 아래 차나무 이파리에도 눈꽃이 피었다. 새봄에 죽로차가 될 여린 순을 내는 중이다. 울퉁불퉁 가파르고 미끄러운 길이 이어진다. 해발 586m 노적봉이 우뚝하다. 그 아래라고 한다.
대나무 울타리를 한 사립문이 보인다. 돌계단 위로 상견성암(上見性庵)이다. 널조각에 새긴 현판이 소박하면서도 힘이 있다. 바람막이 석벽을 덧대고 동판기와를 얹었다. 기척은 없다. 밥그릇의 알갱이 몇 개가 그 사연을 말한다. 처마 끝에 내린 고드름만이 ‘똑똑’ 누구냐고 물어온다. 허락받은 사람만 올 수 있다는 소리다. 스님의 마루에 앉았다. 하늘을 덮은 눈구름 아래로 여백의 수묵화가 끝이 없다. 저기가 흑석산과 가학산, 멀리 두륜산이다.
상견성암 터는 바위 사이를 토석으로 메우고 돌을 쌓아 만들었다. 다 채울 수 없는 작은 틈새가 많다 보니 간혹 울림이 난다. 즉심즉불(卽心卽佛)하는 본성을 더하고 더해서 성불에 이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혹여 그르칠라, 신장(神將)바위가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 검붉은 철분 끼가 벼락을 몇 번이나 맞았는지 모르면서도, ‘천 봉우리는 용처럼 빼어나고 만 계곡은 호랑이가 다투는 듯 하다’고 한 ‘천봉용수 만령쟁호(千峰龍秀 萬嶺爭虎)’ 여덟 자는 여전하다. 그 아래 널찍한 바위 위로 구정봉을 닮은 알터, 웅덩이도 있다. 고인 물을 정안수로, 수천 년 전부터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던 선인들의 흔적이다.
월출산은 어디서나 좋다. 계절마다 다른 빛과 색으로, 시시각각 비춰오는 기운이 일일신(日日新)하게 한다. 차창 밖으로 하다가도 종종 찾는 이유다. 예부터 청천(靑天)이 아닌 산간(山間)에서 달이 뜬다고 할 만큼 기암을 자랑한다. 도갑사는 그 서남쪽에 자리한다. 구림 출신 도선국사가 창건한 5갑사의 하나로, 수미왕사가 세조의 지원을 받아 선종대찰로 중창했다. 한때 966칸에 중견성암, 봉선암 등 12암자를 거느렸다. 효종 4년(1653년)에 설치한 도선수미비에 담긴 얘기다. 오늘날엔 상견성암과 미륵암만 남았다. 다른 곳은 길마저 끊긴 채, 자연바위를 파낸 맷돌과 초석만이 옛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도갑사로 가는 길은 눈밭이었다. 이른 아침인지, 더 급한 일이 있었는지… 옛 식당자리마저 초목이 차지한지 오래다. 발길 없는 그 곳으로 간다. 450년 팽나무, 불 꺼진 차담, 홍예 옥룡교를 지나니 해탈문이다. 번뇌를 털어내며 오층석탑, 대웅보전, 석조(石槽), 용수폭포, 석조여래좌상을 지난다. 눈을 쓸어내니 숲속의 청소부 버섯과 새들의 날갯짓 그림판도 보인다.
바람 한 점 없이 푹한 날인데도 기온은 오르지 않았다. 겨울나무 이파리를 얼게 하고 속눈썹까지 쩍쩍 붙게 했다. 그 안에 상견성암이 함께했다. 정토삼부경을 번안한 청화스님(1924-2003)이 꼬박 3년을 묵언정진하신 곳으로도 이름났다. 둥굴레뿌리 생식가루 한 되로 석 달 열흘, 하루 한 끼, 생쌀을 물에 불려 씹으며 최소에너지만 섭취했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하면 감사의 마음에 끝없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렇게 큰 깨달음과 지혜를 얻고자 함은 무엇이었을까? 내 기쁨만이 아닌 중생을 위한 구도(求道)의 길이었다. 이제 오늘 일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더 이상의 미혹(迷惑)은 없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인가? 아니, 잠시 머물다 간다.
- 본 기고는 글쓴이의 허락을 맡아 익명으로 게재하는 글입니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09.23(수) 1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