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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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이야기
  • 입력 : 2021. 01.21(목) 16:13
  • 영암일보
기상예보대로 바깥 날이 차갑다. 백룡산에 가는 날이다. 해발 150m 여운재에 차를 세웠다. 비를 다하지 못한 흰 구름이 용이 되어 쉬어간다는 옛 지방도 819호선이다. 겨울이면 빙판길로 막히던 곳에 2016년 9월, 310m 터널을 뚫었다. 183억 원의 가치가 덕진과 금정 찻길을 수월하게 했지만 ‘언덕위의 하얀 집’은 먹고 사는 게 불편해졌다. 그래도 월출산과 넓은 읍내를 바라보는 맛은 이곳이 최고다. 아침 안개를 품었다. 1월 두 번째 주말이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여운사의 바람을 안고 대밭 길로 향했다. 검은 무자비(無字碑)가 먼저다. 쓰고픈 글이 많아서인지, 아직 새기지 못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솔밭길이 푹신하다. 쭈뼛쭈뼛 마삭 줄을 비탈로 산판이 한창이다. 도가제를 내려 보며 고인돌인지, 원래 바위인지, 오르막에 애기돌까지, 시각의 차이가 생각을 다르게 한다. 노가지나무가 소코뚜레, 지팡이, 새봄에 수액을 낼만큼 제법 크다.

옛길 오리나무를 지나, 두 바위 형제봉이다. 갓을 쓴 소나무에 붙은 송담이 통통하다. 밀양박씨 선산임을 알리는 흐릿한 비석과 낡은 벤치, 새로 심은 청단풍이 함께하는 쇠재다. 언제나 그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고 한다.

‘너무 힘들다고 하네요.’ 옹골재, 가막재를 코앞에 두고 좌로 내려간다. 산중습지에 딱따구리가 구멍을 낸 백년 오동나무가 좋다. 시누대밭을 지나니 아천임도, 도리깨나무도 보인다. 광주완도고속도로 영암휴게소 공사현장을 지나, 길 없는 길을 만들며 비탈을 오르고 개거를 건너서야 출발지로 돌아왔다. 예정에 없던 고난이다. 그래서 목표는 함부로 변경하는 게 아니다. 이제 600년 모산동약(茅山洞約)을 품은 영팔정으로 간다. 우물마루, 두리기둥, 민도리가 지난 얘기를 전한다. 간은정로를 따라 죽봉사, 아천미술관, 모산사까지 참 좋다. 길 건너 봉우리가 사자산이다.

날이 저물어간다. 저녁상에 케이크가 올라왔다. ‘뭔 일이데?’, ‘아빠, 너무 하네요. 엄마 생신이에요.’ 지난밤 늦게 아들이 내려온 이유를 알았다. 그래 맞다. 숨을 쉴 수 있음에 감사하는 날이지…

‘아빠는 낼 서울 간다.’ 깨복쟁이 친구가 피부근염으로 고생하더니, 입원 한 달 만에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알고 보니, 중년여성에게 흔한 교원병(膠原病)의 하나였다. 자가 면역기능 장애로 연결되며 온몸에 바이러스가 퍼져버린 것이다. 슬프다. 이런 당부를 했다. ‘면역저항력을 키울 수 있는 음식을 즐기면서,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고, 만병의 근원인 뱃살은 찌지 않게, 내가 아프면 가족이 힘들어하니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 삼십이면 이립(而立)이니 잘 알아서 할 것으로 믿는다.’

주일 아침이다. KTX를 탔다. 2014년 10월 셋째 주말풍경도 그랬다. 들판은 물안개로, 야산 억새는 더 희어졌고, 야트막한 굴뚝에선 밥을 짓는 긴 연기가 오르던 때다. 그의 아들 혼인날이었다. 이번 길에는 눈이 내렸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겠다며 하얀 세상을 만들어갔다. 시악바우와 사장나무 친구들이 다들 모였다. 강원도 영란이와 남양주 옥님, 중식, 행식, 영동, 두현, 홍근, 대영, 동호, 양훈이는 ‘활짝 웃는 볼에 보조개를 피어 올리며 큰 위안을 주던 친구’라 했다. 사십여 년 전 서울역에서, 11시50분 광주행 열차에 저녁참을 챙겨주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빈소마저 소박했다. 작은 방에서, 오지말래도 극구 찾아오는 이들만 맞이했다. 코로나19가 만든 상황이라, 오래 있을 수도 없다. ‘차 한 잔 하세요.’를 괜찮다며, 영정 속 미소만 눈에 담았다. 그래도 막내 종란에게 천상행 여비를 쥐어주며 ‘잘 모셔라’했으니… 됐다.

지난해 말에는 ‘전라도에서 태어난 최고의 천사,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생각나는, 혜교의 미모라도 따라올 수 없지요. 얼른 힘내서 함께 거닐 날을 기대합니다.’ 도로명주소 엽서를 보냈더니, ‘고마워~ 마음을 울리네.’라며 이모티콘과 함께 답을 해왔는데, 허망하다. 이젠 다비장을 치르고 안식을 찾았을 거다. 이렇게나마 친구를 추억한다. 그녀를 기억하는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다시 여명의 일상을 맞이한다. 복수초(福壽草)가 눈밭의 꽃이 되고, 홍매화도 피어날 채비다. 다들 건강하자. 재밌게 살자.

- 본 기고는 글쓴이의 허락을 맡아 익명으로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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