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 한석봉과 그의 스승 영계 신희남 선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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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 한석봉과 그의 스승 영계 신희남 선비 이야기
- 심심풀이 우리역사
  • 입력 : 2021. 02.02(화) 09:32
  • 영암일보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석봉의 이름은 한호다. 본관은 삼화 한 씨요. 자는 경홍. 호는 석봉이다. 1543(중종 38)년 개성에서 태어나 1605년 6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언공이요. 어머니는 홍주 백씨이다. 군수를 지낸 한 대가의 5대손이자 정5품직 정랑을 지낸 한세관의 손자다. 아버지는 벼슬을 지내지 못하고 요절했으나 화담 서경덕과 친분이 두터웠음을 보아 학문이 깊은 선비라 여겨진다.

호가 석봉이 된 이유는 그가 태어난 개성의 ‘석봉산’ 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자랐기 때문에 호를 ‘석봉’이라 했단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한테 글을 배웠다. 10세 때는 할아버지마저 별세로 집안 살림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석봉은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고 고집이 세고 의지가 강했으나 비교적 말이 적은 편에 사람을 가려가며 사귄 흔적이 엿보인다. 한석봉이 명필이 되기까지 우리 영암 출신 선비 신희남이 석봉의 스승으로 철저한 개인지도에 인성교육을 제대로 실시한 결실이다. 부모와 스승은 매를 때려서라도 올바른 사람을 만들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 엄격한 스승이기도 했다.

영계 신희남(1517~1591)은 영암 영보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당대에 뛰어난 서예가이다. 자는 길원, 호는 영계이며 본관은 거창 신씨다. 부친은 신우장이며 모친은 평시령 김제의 딸이다. 신희남은 8세에는 교하의 신지건, 13세에는 장단의 신희복, 18세에는 개성에 사는 서경덕에게 사사했다. 22세에는 한양에서 성혼의 부친인 성수침을 찾아가 배웠다.

154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선무랑이 되었다. 155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0년 정5품 수찬과 정4품 장령을 역임하고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부교리, 사간, 교리, 집의, 좌승지 등을 지내고 1576년 강원도 관찰사, 병조, 예조참의도 지냈다. 1581년 동서로 갈라진 붕당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환멸을 느끼고 금산군수를 마지막으로 사직하고 당쟁을 피해 고향 영암으로 낙향했다.

서당인 죽림정사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귀향하여 허물어져 가는 사당을 개수하고 부근에 연못을 만들어 청백리를 상징하는 연을 심고 언덕에는 충절을 상징하는 오죽을 심어 ‘이우당’이라고 하였다. 송양서원도 지었으며 연촌 최덕지와 처족 관계였던 웃대 할아버지 신후경이 낙향하여 함께 건축한 영보정도 새롭게 중수하고 대학자인 율곡, 청백리 박순, 외교관 이후백을 가까이했으며 김인후, 박순, 이준백, 정탁, 백광훈, 심희수, 임억령, 신장 등 당대의 학식이 뛰어난 호남 선비들과 왕래하며 학문을 넓혔고 특히 담양 출신 미암 유희춘과는 절친이었다.

▲ 영암 이우당

영계 신희남이 한석봉을 만나게 된 계기는 154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할 때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윤임 일파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을사사화로 인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개성에 있던 백인걸을 만나 석봉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백인걸은 1537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남평 현감을 지낼 당시 반대당에 의해 1547년 안변에 유배생활을 하다가 1551년에야 사면되어 개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도학을 가르쳐준 스승 서경덕도 뵐 겸 개성을 찾게 된 것이다.

개성에 도착한 신희남을 백인걸은 반갑게 맞이했다. “영계 선생 먼 걸음 하셨네. 이렇게 훌륭한 분이 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오다니 감격스럽구려” 하며 웃음꽃을 피운 채 밤새 기울이는 술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었다. “영계 자네 마침 잘 왔네. 이곳 개성에 글씨를 잘 쓴 신동이 있다네” 하며 석봉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석봉의 선친과 서경덕의 친분도 곁들였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참은 채 다음날 서경덕을 찾아뵙고 큰 절로 재회했다.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는데 글 신동 석봉에 관한 이야기를 화담이 꺼냈다. 서경덕은 신희남에게 “글씨 쓰기를 좋아하는 재주가 많은 영특한 아이인데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렵고 누가 키울만한 그런 사람도 없고 하니 자네가 이 아이를 좀 맡아 가르치면 어떻겠는가”하며 석봉을 부탁했다. 서경덕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고 나서 “예 스승님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백인걸을 만났는데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스승님의 간절한 부탁이기도 하니 제가 한번 아이를 만나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당장에 석봉을 만났다. 이때 석봉의 나이 9세였다. 석봉의 글씨 솜씨를 확인해 보았다. 신희남은 석봉의 글씨를 보고 속으로 깜짝 놀랐고 감탄했다.

▲ 석봉 한호 글씨

아들의 장래 교육 문제로 걱정하던 차 석봉의 어머니는 서경덕 선생한테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단걸음에 달려와 신희남의 발아래 엎드려 “우리 아이의 스승이 되어주십시오” 하며 간절히 부탁 했다. 백인걸도 신희남에게 “그렇게 하시게. 왕대밭에 왕대 나는 법이니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당연지사 아닌가?” 서경덕도 한호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옆에서 거들었다. 신희남은 “내 고향은 전라도 영암입니다. 이곳 개성에서 저 남쪽까지는 천리도 더 되는 먼 곳입니다”하고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알았습니다.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하는 길인데 천리면 어떻고 만리면 어떻습니까? 하지만 제 형편도 넉넉지 못하니 아이가 고생할 것입니다”하며 한호를 데리고 가 제자로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석봉의 어머니 백씨는 가산을 정리해 신희남을 따라 천리길 타향 영암으로 이사했다.

이리하여 신희남은 영암 죽림정사에서 자신의 대과(大科) 준비를 하면서 석봉을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가르쳤다. 석봉의 어머니는 양반집 아낙의 신분을 버리고 영암 학산면 용산리 마을에 거처를 삼고 생계수단으로 떡을 만들어 서호 아천포 다리거리 밑이나 독천장에서 떡을 팔았다. 떡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모진 수모를 감내했다. 오직 자식 교육을 위해서 다른 것을 생각지 않았다.

▲ 영암 죽림정사와 석봉 한호 선생

떡 썰기와 글씨 쓰기 대결의 유명한 일화도 남긴, 어머니의 훈육과 신희남의 철저한 가르침으로 드디어 1567년 24살 때 소과 진사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한 배려였던지 이상하게 대과를 준비하지 않고 말단 벼슬길에 나섰다. 글씨를 잘 썼기에 대부분 나라의 문서를 다루는 직책에 있었고 1583년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고 1592년 임진왜란 때도 왕의 행재소에서도 외교문서를 다루어 그 괴팍한 선조의 신임을 얻었다. 선조의 자상한 배려로 가평군수, 흡곡현령을 지내며 글씨를 연마했다.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5번이나 다녀오기도 했다. 명나라에서 한석봉이 쓴 글씨를 보고 왕희지와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버금가는 명필이라는 극찬과 칭송으로 조선의 자존심도 세웠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의 끊임없는 지원과 총애를 받아 종4품 가평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대과출신이 아니었기에 작은 잘못도 시비를 걸어 탄핵했고 결국 종6품 통천현감으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고 대과출신들의 갑질 때문에 은퇴했다.

당대의 세평이, 도학에서는 서경덕, 충의에서는 송상현, 문장에서는 차천로, 필법에서는 한석봉이라는 높은 평가도 받았다. 명필 한석봉이 태어난 곳은 개성이었지만 그를 키워낸 곳이 영암이요. 대쪽 같은 선비 영계 신희남의 수제자였기에 한석봉의 천자문과 독특한 필법의 탄생이 가능했다. 따라서 만시지탄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영계 신희남 선비의 학덕과 선비정신과 한석봉의 발자취들을 발굴 수집하여 영암이 학문의 고장임을 널리고 알리고 후세들에게 큰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